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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어캣 Sep 15. 2023

오직 너만

누구도 나를 이렇게 만들 수는 없을 거야

흘러가는 강물 위로 햇빛이 환하게 부서지던 아침이었다. 이제는 내가 사는 도시의 시내보다 더 친숙해진 너희 동네에서였다. 우리는 손을 꼭 잡은 채로 광진교 위를 걸어가고 있었다. 바람이 차다는 감각은 없었고 맞닿은 손에선 온기가 전해왔다. 주거니 받거니 대화가 오가다가 말이 끊기는 지점이 있었다. 너와 내가 발걸음을 멈춘 것도 그때였다. 너는 머뭇거림 없이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네 가슴에 머리를 가만히 기대어 내 머리카락을 천천히 만지고 있는 너의 손길을 느꼈다. 이런 순간은 몇 번 더 생겨났다. 그중에 한번은 재미있는 대화가 곁들여지기도 했다.


"자기, 자기는 그 에코백 잘 들고 다니잖아."

"응. 왜?"

"내가 이거 그냥 들면 자꾸 바닥에 끌리는 것 같아."

"쪼그매서 그래."


얼떨결에 너에게 안긴 채 생각했다. 아, 이번엔 조금 기습적이네. 하긴 너랑 내가 20cm쯤 키 차이가 나긴 하지. 얘, 널 만나기 이전엔 내 키가 더도 말고 165cm 정도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었어. 그렇지만 그에 미치지 않는 작은 키라는 사실도 의외로 나쁘지 않네.


너와 손을 잡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고 무게 잡고 청하는 사람도 없이 자연스레 그렇게 된다. 손끝과 손끝이 스치다가 손바닥과 손바닥이 가까이 붙는다. 잡은 손에 가볍게 힘이 들어간다. 너와 나의 손이 각기 다른 온도를 띠고 있을 때가 있다. 최근 몇 달간은 겨울이었기에 바깥에 오래 있다가 들어온 한 사람의 몸이 더 차가운 것이다. 그렇지만 차갑다면 덥혀주면 그만이다. 너의 체온이나 나의 체온으로. 때때로 너와 나의 손이 각기 다른 감정을 담고 있기도 하다. 생각보다 다채로운 감정들이 손을 통해 전해진다. 마음 한구석 어딘가가 불안정하다면 미세한 떨림으로, 편안하고 행복한 날에는 애정을 담은 어루만짐으로, 가슴속에 어떤 결의나 확신이 섰다면 저도 모르게 잡은 손에 힘을 주는 행위로.


너를 안아본다. 나름 장거리 연애를 하는 우리라서 주말 외엔 너를 만날 시간이 도통 나질 않는다. 그렇기에 만나서 너를 실컷 안고도 돌아서면 부족하다고 여기기도 한다. 사실 지금 이 순간에도 너를 안고 싶다. 너의 너른 품과 따스한 체온이 그립다. 그런데 내가 너를 안는다는 말은 현실의 그림과는 조금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내가 적극적으로 네 안에 파고든다 해도 결국에는 너의 가슴에 내가 폭 안겨있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이다. 너는 간혹 나를 안으며 내 목덜미에 얼굴을 깊이 파묻고 그대로 한참을 서 있을 때가 있다. 하루는 그럴 때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네게 물었다. 대강 아래와 같은 대답들이 돌아왔다.


'아, 파묻히고 싶다.'

'너무 작고 소중하다.'

'사랑해, 사랑해.'


맨 먼저 손을 잡자고 한 건 내 쪽이지만 처음으로 우리 한번 안아보자고 한 건 네 쪽이었다. 우리는 사이좋게 한발씩 가까이 다가섰다. 만일 너나 나 둘 중 한 명의 걸음이 유달리 빠르고 컸더라면 지금의 우리 관계는 없었을지 모른다.


때로는 우리 두 사람의 눈에만 씌워진 특수 필터가 있는 것 같다. 너는 너 자신이 불완전하고 단점도 많고 삶의 어려움과 상처가 있는 한 인간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는 사실을 올바르게 인지하면서도, 내가 너와 있을 때 뚜렷하게 느끼는 감각은 안정감과 굳건함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우리나라 여성의 평균적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외모의 소유자이며, 필요할 땐 필요한 만큼의 힘을 발휘하곤 하는 한 인간일 뿐이다. 하지만 너의 손에 이끌리고 네 품 안에 들어와 있을 때면 나는 항상 작고 귀엽고 예쁘고 소중한 사람이 된다. 그러면서도 너는 나의 저력을 존중하고 있다. 나는 그 모든 사실이 감격스럽다.


우리는 관계의 첫발을 내디뎠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다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는 우리만의 영역을 그려왔다. 너는 나의, 나는 너의 손을 잡으며. 깊이깊이 녹아내릴 듯이 서로를 안아주며. 네 가슴에, 나의 목덜미에 서로의 얼굴을 묻으며. 서로의 머리카락과 뺨을 어루만지며. 만지고 싶은 기분이란 건 사랑의 속성이다. 내가 언젠가부터 너를 생각할 때마다 네 손을 잡고 싶어 했던 것처럼. 우리가 사귀기 시작하던 그날, 네가 날 보내기 전에 나를 한번 안아보고 싶어 했던 것처럼. 아주 가까운 친구나 심지어 가족이라도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은 찾을 수가 없다. 내일모레인 금요일 저녁에도 나는 너를 몇 번이고 쓰다듬고 만져주려고. 산뜻한 밤바람을 맞으며 길 저편에서부터 내게 달려올 너를.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너를. 오직 너만을.


(2023.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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