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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어캣 Sep 15. 2023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나의 예민한 비상 램프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1974년 해외 영화의 제목이자 2004년에 우리나라에서 발표된 노래의 제목이기도 하다. 영화의 줄거리나 노래 가사나 불안이라는 감정의 디테일과는 딱히 관련이 없는 듯 보이지만, 두 작품의 제목만은 수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었을 것이다. '영혼을 잠식한다'라는 묘사가 사람을 천천히 말려 죽이는 불안의 속성을 직관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다.


문득 외부의 자극 없이 머리가 뜨겁게 달구어질 때가 있다. 사랑이나 열정 같은 긍정적인 감정 때문에 설레이는 상태와는 거리가 멀다. 기계에 비유하면 과부하가 걸려있는 상태에 가깝다.  머릿속의 비상 램프가 빨간색으로 점멸하기 시작하고, 무엇 때문인지 모르더라도 위험하니 일단은 대피하든가 뭔가의 조치를 취해달라는 경고음이 웅웅거린다. 이보다 부하 수준이 더 올라가면 머리뿐만 아니라 온몸이 비명을 지른다. 몸에는 이상이 없는데도 열이 나고 손발이 저려오고 뱃속이 울렁거리고 심박수와 혈압이 치솟는다. 불안이 끝간데를 모르고 솟아올라 내게 펼쳐 보여주는 낯선 지평, 공황이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상태가 나쁘지는 않더라도 나의 민감한 비상 램프는 수시로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한다. 무엇보다 나를  미치게 하는 사실은 이 모든 경보에는 뚜렷한 실체가 없다는 점이다.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다. 평소에 건강 관리 차원에서 약을 매일 먹고 있기 때문에 조치 또한 어렵지 않다. 정기적으로 병원에 갈 때 의사에게 이야기하고 불안감을 완화시키는 약을 추가로 받아오면 되니까. 그리고 약을 먹지 않는 건강한 사람들에게도 적당한 불안은 정상적인 감정이다. 그러니 괜찮다. 저절로 괜찮아질 것이다. 어디까지 나만의 일이라면, 불안감 때문에 나 혼자만 잠시 불편하고 힘든 거라면.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불안은 나와 너, 우리의 관계에 직접적인 악영향을 미치는 불청객이다. 우리 사이에 실제로 일어났던 다음과 같은 상황들처럼.


어느 날 나는 호텔 객실에서 너와 더불어 따스하고 포근한 시간을 함께 보내고 나와서는, 그날 새벽에 난데없이 너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 나의 불안을 토로했다. 하필이면 네가 야근을 하고 회식까지 마치고 들어가야 하는 날에 너에게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내면서 반응을 기다리기도 했다.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제대로 쉴 수 있는 사람인 너에게 계획도 없이 1박을 하자거나 주말 양일 모두 만나자고 보챈 적도 여러 번 있다.


아직까지는 나의 돌발적인 행동으로 인해 우리 사이가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던 듯하다. 너의 노력으로 인해 오해는 금세 풀렸고, 설령 오해가 아니더라도 난관이 오래가진 않았으며, 너는 나의 무리한 부탁을 대체로 들어주었으니까. 하지만  내 안에는 또 다른 종류의 불안이 스멀거리며 올라올 때가 있다. 내가 내 감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에 휘둘릴 때 그 끝에 기다리고 있을 파국이라든지,  아마 그런 것들을 두려워하는 것일 테다.  불안은 나의 영혼뿐만 아니라 너의 자유도 우리 관계의 앞날까지도 갉아먹을 수 있다. 그대로 활개치게 내버려둔다면, 내가 내 감정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2023.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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