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어캣 Sep 15. 2023

질투가 나의 거울이 될 때

자잘한 질투심으로 들여다보는 나의 민낯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같이 다이어트를 하기로 한 애인의 체중 그래프가 순조롭게 우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고 하면 어떠한 사심도 없이 오로지 축하와 응원만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입으로는 축하와 응원과 격려의 말들을 열심히 주워섬기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반길려야 반길 수 없는 익숙한 감정들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하나는 불안이었다. 같이 살을 빼기로 했는데 나중에 가서 애인 혼자만 목표를 달성하고 나는 그대로라면 어떻게 되는거지. 또 하나는 차마 그 정체를 입으로 말하기에도 내키지 않는 감정이었다. 어째 나는 그대로일 것 같은데 홀로 순항중인 그에 대한, 아주 사소한 질투 말이다.


내 애인과의 관계에서 질투심을 느껴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내 질투에는 남들과 비교되는 특징이랄만한 점이 있는데, 큼직큼직하지 않고 자잘자잘하게 피어오른다는 것이다.


자기 애인의 여자 관계에 대해 질투하는 여자들은 많을 테지만, 애인도 썸도 무엇도 아니었던 십여년 전의 기억에 대해 질투하는 여자는 과연 세상에 몇이나 될까 싶다. 그런데 맙소사, 내가 바로 그런 인간이었을 줄이야. 애인과 정식으로 사귀기 이전 썸 단계의 어느 날, 그가 자신의 블로그에 먼 과거의 인연에 관한 글을 하나 올렸다. 대학생 시절 짝사랑했던 미모의 교수님에 관한 이야기였다. 추억은 추억일 뿐 돌아갈 수 없고 그에겐 그럴 마음도 없었을 터인데, 왜인지 나는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매주 수업이 끝나고 교수님이 나올만한 시간대를 기다려 집으로 가는 통학버스에 한 타이밍 늦게 자리잡았다."라는 대목에서는 '아, 이 사람은 자기가 반한 여자에겐 이렇게까지 하는구나.'라는 데에 생각이 미쳐 은근히 심통이 나기까지 했다. 다행히 애인은 이런 나의 소인배적인 면모를 귀엽게 봐주었지만, 나는 못내 부끄러웠다.


그런가하면 애인과 나의 공통된 취미인 글쓰기에 대한 에피소드 또한 있었다. 나와 내 애인이 맨 처음 서로를 알게 되었던 소셜 모임 커뮤니티가 있다. 지난 가을, 그 커뮤니티에서 '아카데미'라는 이름 하에 동화작가님 한 분을 섭외해 일회성으로 문장 쓰기 강좌를 열었었다. 그 강좌에 함께 참가했던 그와 나는 마주보고 앉아  작가님이 주시는 주제에 따라 다양한 문장들을 열심히 썼다. 나는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강하게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사람이란 걸 스스로 알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수업에 임했다. 그런데 정작 문장을 발표하고 나서 가장 많이 인정받고 칭찬받은 사람은 내가 아니라 애인이었다. 작가님은 애인이 쓰는 문장 하나하나마다 찬사를 아끼지 않으셨고, 심지어 "딱히 손댈 곳이 없네요."라는 코멘트까지 붙이셨다. 그날의 강좌엔 다른 분들도 여럿 참여하셨지만, 나는  애인의 문장과 그에 대한 작가님의 평가에 나도 모르는 사이 차츰 집중하고 있었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승부욕이 마음 한가운데에서 일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약간 더 크기가 작은 감정 또한 떠올랐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건 명백한 질투였다.


짐짓 대범하고 너그러운 척 하면서 나는 질투 같은 건 모른다고 자신있게 말하고 싶지만, 정작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못한 경우를 살면서 많이 겪었다. 심리학자들의 흔한 의견처럼 이 감정을 잘 활용하기만 하면 내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걸 부정하진 않겠다. 기형도 시인은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시를 썼고 동명의 한국 영화도 나왔다. 그만큼 이건 보편적인 진실이다. 하지만 질투를 나의 힘으로 삼기에 앞서, 질투라는 감정은 내겐 거울과 같은 존재다.  때때로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오르는 자잘한 질투심을 자각할 때마다, 나는 나의 민낯을 클로즈업하여 마주한 기분이 든다. 마치 집에서 아무 치장도 하지 않고 있다가 거울 앞에 별안간 세워져 꾸밈없는 상태의 나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이렇듯 내가 꿈꾸는 내 모습과 실제 나의 모습에 적잖은 차이가 있다는 걸 인정하는 데에는 시간이 꽤 걸린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그림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은 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캔버스 한쪽에는 내가 바라마지않는 큰 그릇을 지닌 나의 이상이 자리한 반면, 졸렬하면서도 미워할 수는 없는 나의 현실이 정확히 그 반대편에 서 있는 그림 말이다.


(2023. 1. 24.)

이전 21화 안경을 닦고 바라보는 세상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