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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어캣 Aug 16. 2023

2020년대의 펜팔 친구

그날의 댓글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주변인들은 우리가 글쓰기 모임에서 만나 연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말은 사실이다. 동시에 절반만 사실이기도 하다. 확실히 우리는 글쓰기 모임에서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했다. 다만 어디까지나 모임 구성원 중의 한명으로서. 정작 너와 내가 본격적으로 일대일 관계를 쌓아가기 시작했던 무대는 모임이 아니라 서로의 블로그였다. 나는 모든 것의 시작점을 아래의 댓글 대화로 여긴다. 네가 작년 2월 23일 모임 게시판의 내 게시글에 달아주었던 응원과 격려의 메시지 말이다.

2022년 2월 23일

그로부터 3개월에 이르는 시간 동안 우리는 오로지 댓글로만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보다 더 빠르고 즉각적인 소통 방식을 모색하기에는 큰 장애물이 하나 있었다. 당시의 나는 공무원 수험생 신분이었다. 혹여 마음이 동했다 하더라도 이성관계에 마음을 빼앗겨선 안 되었다. 댓글 대화가 긴 시간 이어지면서 너의 연락처를 받고 싶고 너를 오프라인에서 다시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최소 이듬해 6월까진 백수 수험생의 위치에 머물러야 하는 나로서는 차마 너에게 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모색해보자고 제안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러다가 5월 29일에 네가 신청한 영화 모임을 혹시 놓칠세라 발빠르게 신청해서 너와 드디어 재회했던 일이 터닝포인트가 되지 않았나 싶다. 모임을 신청하는 도중에도 머릿속에서는 셀프 가스라이팅이 진행중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 사람과 인간적인 친분을 쌓고 싶은 거야. 수험생활 도중에 연애나 썸 같은 걸 시작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대충 위와 같은 생각을 주워섬기면서. 추호도 없긴 뭐가 없어. 알고보면 사심으로 가득했으면서. 여튼 너와 즉석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더라도 꽤 오랫동안 댓글 소통은 끊어지지 않고 지속되었다. 연락처를 교환하여 카톡 대화를 나누고, 내가 수험생활의 종지부를 찍고, 너와 통화가 가능해지고, 결국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한 이후로도.

2022년 3월 26일
2022년 4월 9일

"펜팔 친구 만난 것 같아!"


5월 29일에 들었던 너의 감탄사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펜팔이라는 표현이 과연 적격이었다. 3월부터 6월까지 댓글로만 소통이 가능했던 시기의 우리 관계에는 느리고 답답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보단 지금과 분명 다른 즐거움이 존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싶다. 카톡과 전화라는 즉각적인 의사소통보다 호흡이 한 템포 느린 대신 기다림의 설렘과 기쁨이 존재했던 것이다. 또한 돌이켜보면 2020년대에 이미 들어선 그때 시점에서 이토록 정적이고 심사숙고가 가능한 소통 방식만을 3개월 가까이 고수했다는 사실에 대해 더욱더 특별하면서도 클래식한 낭만을 느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우리는 둘 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다. 너와 내가 함께 경험해본 결과, 댓글 또한 훌륭한 글이 될 수 있지 않았나. 애초에 펜팔이라는 영어 단어의 뜻 자체가 '펜으로 만드는 친구'라는 뜻이란다. 이보다 더 적절한 해석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으니 오늘 글은 여기서 이만 마무리지을까 한다. 나의 펜팔, 나의 친구, 나의 연인을 눈앞에 그리며.


(2023.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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