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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어캣 Aug 18. 2023

마법이 이루어지는 순간

손 한번 잡아봐도 돼요?

2023년 2월 19일 석촌호수 서호 나무 데크에서 당신과 함께

석촌호수는 서울 도심의 마천루 롯데월드타워가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에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는 수변 공원입니다. 이곳엔 무슨 특징이 있기에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일까요? 일단 여기는 롯데월드 매직아일랜드의 뒷배경으로 유명합니다. 보기만 해도 아찔한 자이로드롭과 자이로스윙 둘 다 석촌호수 서호를 배경삼아 움직이죠. 또한 이곳은 송파구 잠실동 주민들의 운동 코스입니다. 당신과 이쪽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농담 삼아 얘기했던 일이 기억나요. 여기서 수수하게 입고 운동하는 사람들 중엔 상당한 재력가들이 포함되어 있을 거다. 이 주변의 상권은 휴일마다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9호선 송파나루역 일대는 SNS 맛집과 카페가 즐비한 핫플레이스이니까요. 마지막으로 여기는 강북의 여의도와 더불어 강남권의 대표적인 벚꽃놀이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객관적 사실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 글에서 오로지 당신과 나 사이의 일만 생각하려고요.


이곳 석촌호수는 우리가 처음으로 손을 잡았던 곳입니다. 시간은 2022년 9월 18일 오후에서 저녁으로 넘어가던 타이밍, 정확한 장소는 서호에 있는 계단식 나무 데크의 맨 아랫층이었어요. 그날 이전까지는 어쩌다가 한번씩 모임에서나 얼굴을 보며 블로그 댓글과 카톡 메시지로만 소통하던 우리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시계 바늘은 거꾸로 감겨 당신이 내게 접선을 시도하던 때로 돌아갑니다. 당신은 앞선 9월 9일의 만남에서 나와 보낸 시간을 즐거워했고 앞으로는 단둘이 만나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은 내게 둘이서만 놀자고 했고 나는 가을 날씨가 좋다는 핑계로 야외 산책코스를 계획에 집어넣었습니다. 난 그때부터 이미 예감하고 있었거든요. 이것은 분명한 데이트이며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 관계의 터닝 포인트가 될 수도 있다는 걸요.


일요일 3시 즈음에 만난 우리는 전형적인 썸 단계의 남녀처럼 행동했어요. 예쁜 베이커리 카페에서 디저트를 먹고, 산책로를 따라 거닐며 좋아하는 뮤지션에 관해 이야기하고, 호숫가에 나란히 앉아 자그마한 뮤직 페스티벌을 감상하면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이 되어가니 우리는 다소 말수가 줄어든 채로 동호에서 서호로 이동하고 있었죠.  문득 당신은 미소 지으며 옆에 있는 나를 바라보았고 나 역시 미소로 당신의 눈빛에 화답했어요. 이윽고 '데크'에서의 시간이 다가옵니다. 데크를 발견한 우리는 위의 사진에서 보이는 위치와 구도 그대로 자리에 고요히 앉아 호수의 물결과, 물결 위에 부서지는 저녁놀과, 놀이기구를 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어요. 나는 흘리듯이 자연스레 그 말을 하고야 맙니다. 사실은 당신 곁에서 걷는 내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제량님, 손 한번 잡아봐도 돼요?"


당신은 대답 대신 말없이 내게 손을 건네주었죠. 나는 당신이 건네준 손을 부드럽게 쥐었어요. 당신의 다부진 손 안에서 따스함이 느껴졌어요. 앗,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그만 당신에게 좋아한다는 말까지 해버렸네요. 당신은 살짝 웃어보이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저도 점점 좋아지고 있으니까."


그렇게 말한 후에 당신은 그간 가능하지 않았던 것을 하나하나 가능하게끔 만들어 주더군요.


"이제 전화하셔도 돼요. 원래는 크리스마스 이브부터 하려고 했는데."


그때까지 당신은 나와 통화로 얘기하면 혹시라도 말이 뚝뚝 끊기고 어색해질까봐 통화는 되도록 꺼리고 카톡만 이용했다고 했어요. 그러던 당신이 마침내 마음을 열어주었네요.


"고백을 먼저 하기보단 받고 싶단 얘기를 유하님 블로그에서 본 적 있어요. 고백...받고 싶으시죠? 이 다음엔 제가 할게요."


실제로 당신은 내게 고백을 했어요. 9월 18일 석촌호수로부터 약 3주 정도 열띤 통화와 문자 대화들이 지나간 후의 일이었죠. 나는 당신에게 마음을 전했고, 당신은 내게 고백을 했고, 우리는 정식으로 연인 사이가 되었습니다. 용기를 내어 당신의 손을 잡고 난 이후로 많은 것들이, 참으로 많은 것들이  달라졌어요. 내가 묻고 당신이 답하는 시간은 눈깜짝할 사이였음에도. 나는 그날 그 시간을 기억의 주단 위에서 오려내어 내 마음에 아로새겨놓고 감히 이렇게 부르겠어요. 마법이 이루어진 순간이라고.


자, 이제 첫 문단의 객관적인 사실들을 잠시 잊고 우리만의 책을 쓸 때가 왔어요. 지금의 나에게, 당신에게, 우리에게 석촌호수는 어떤 의미를 가진 곳일까요? 네, 굳이 묻지 않더라도 당신 역시 기억 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군요. 맞아요. 여기는 우리가 처음으로 서로의 손을 잡았던 장소예요. 당신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우리 관계가 지인에서 연인으로 발전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지점이고요. 그전에는 나에게나 당신에게나 별다른 의미가 없었던 호수공원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생각날 때마다 함께 손을 잡고 들러서 그날 데크의 그 자리에 꼭 한번 앉아보는 우리만의 특별한 랜드마크가 되었어요.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석촌호수의 역할이 우리와 전혀 상관없지만은 않을 겁니다. 롯데월드 매직아일랜드도, 봄철 벚꽃놀이도, 어느 볕 좋은 날의 산책도, 이쪽 맛집에 가보려고 웨이팅 줄을 기꺼이 서는 일도 우리는 하나하나 현실로 만들어갈 테니까요.


(2023.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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