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가 머무르는 최소의 시간 단위
삼십 초. 우연이 아닌 필연과 실수가 아닌 의도가 머무르는, 아마도 최소의 시간 단위. 누군가를 몇 초간 흘끗 봤다는 건 아무에게나 그랬을 수가 있지만, 삼십 초 동안 계속해서 눈을 떼지 않고 바라봤다는 건 명백히 상대방을 가려가면서 했을 일이다. 갖고 싶은 물건 앞에 몇 초 머물다가 이내 스쳐지나가는 일은 언제든 있지만, 그 물건 앞에 삼십 초 이상 머물렀다면 결국 나중에 가서는 그게 내 것이 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대학 입시 때 지망하는 과를 선택할 때에도, 취업 시즌에 가장 먼저 주력으로 지원할 기업을 고를 때에도, 시선이 닿아있는 시간의 길이가 많은 것들을 결정짓는다. 내 마음의 방향은 내가 바라보는 방향이 되고, 내가 정한 방향을 길게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나의 선택은 선명해지고 확고해져간다. 즉, 응시는 선택이다.
요즘 애인과 데이트를 할 때, 그와 나는 쉴새없이 떠들기만 하진 않는다. 최근에는 말이 필요없는 순간들의 비중이 조금씩 늘고 있으며 그 중에는 우리가 "손멍"이라는, 언뜻 읽으면 뜻을 알기 힘든 행동을 하며 잔잔히 소통하는 시간이 항상 있다. 내가 말하는 "손멍"이란 이런 것이다. 카페 테이블에 마주앉아 손을 잡은 채 한참동안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 예전에 유행했던 "불멍"이나 "물멍"과 같이 서로의 "손"을 잡고 "멍" 때린다고 해서 나온 단어가 "손멍"인 셈이다. 이걸 할 때 우리는 삼십 초 정도는 우스울 만큼 오래도록 서로를 깊이 바라보곤 한다. 언젠가는 그에게 나를 그렇게 바라볼 때 너는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은 적이 한 번은 있다. 그는 속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끊임없이 읊조리며 내 얼굴을 본다고 했다. 나는 그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처럼 내 곁에 계속 있어달라고. 마음의 크기는 시선의 방향을 결정하고 시선이 머무는 시간도 결정한다. 이와 같은 가정에 따르면 그 순간 우리에게 별다른 말이 필요 없었던 건 어쩌면 당연하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그랬다. 수없이 뜨고 지는 무수한 블로그 포스팅들 중에서 그가 쓰는 글은 유독 내 눈길을 붙잡았고, 그가 종종 내놓았던 자기 자신의 어려움과 고민들은 결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나는 온라인에 마련된 그의 공간에 오래도록 머무르며 올라오는 글들에 최대한 공을 들여 피드백을 했다. 아, 그리고 6월 중순이었던가. 모임에서 만난 K님과 그와 셋이서 간단한 식사 자리를 가진 후 모임을 하고 헤어지던 순간이었다. 그는 요 앞 편의점에 들른다고 했고 나와 K님만 같은 길을 타고 내려갈 참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K님이 내게 물었다. "안 가?" 나는 스스로도 모르게 내게 인사를 건네는 그를 지나칠만큼 길게 응시하고 있었나보다. 아마도, 정말 어쩌면, 그가 어렴풋이 내 마음의 방향을 알아차릴만큼. 나는 그에게 마음을 품었고, 그가 있는 곳을 깊이 바라보았고, 결국 다가가서 어떠한 선택을 했다. 삼십 초. 우연이 아닌 필연과 실수가 아닌 의도가 머무르는, 아마도 최소의 시간 단위.
(2022. 1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