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어캣 Sep 14. 2023

데이트를 벤치마킹하는 방법

폭력 없는 느와르

“이건 느와르야. 내부자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직을 장악하는 것처럼. 아그레는 우리가 다 먹은 거지.”


너의 실없는 농담이었다. 유리문 사이로 가을 오후의 햇볕이 스며드는 너의 단골 카페에서 들은 말이다. 우리는 허풍스러운 그 말에 동의하며 한바탕 웃었다. 물론 이 농담을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돈이 넘쳐나서 아그레아블(이하 아그레)이라는 소셜 모임 플랫폼과 아그레라운지라는 공간을 모두 사버렸다는 황당한 이야기가 된다. 우리가 하는 말의 뜻은 은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사귀고 난 직후부터 지금까지 아그레에서 제공하는 여러 모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실내 데이트의 상당 부분을 구성해왔기 때문이다.


아그레에 ‘글요일 선데이(이하 글요일)’라는 모임이 있다. 업으로 하는 글쓰기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보람 리더님으로부터 약 3~4년 전에 시작된 글쓰기 모임이다. 그리고 올해 3월 기준으로 드디어 20기를 맞았다. 나는 12기부터 간간이 참여해왔을 뿐이지만 너는 무려 6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거의 한 기수도 놓치지 않고 꼬박꼬박 출석했던 고정 멤버다. 너와 내가 글요일에서 처음 만났다는 점이 이 모임을 더욱더 특별하게 만든다. 우리는 저번 주에도 이번 주에도 글요일에 나가서 글을 한 편씩 쓰고 돌아왔다.


우리가 처음으로 아그레에서 가져온 데이트의 방식 또한 글요일의 랜덤 글감 뽑기와 지정 주제 글쓰기였다. 데이트의 전개는 이러하다. 먼저 노트북을 들고 적당한 카페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는다. 글을 쓸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면 PC 카톡을 통해 글감을 교환한다. 그 후로 30분에서 1시간 남짓 시간을 정해두고 자신이 받은 글감으로 글을 한 편씩 써내는 것이다. 글감은 단어로도 문장으로도 때로는 사진으로도 전달할 수 있다. 글을 다 쓰고 나면 글요일에서 하듯 2인 합평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글쓰기 자체가 재미있기도 하지만 이 데이트의 꽃은 합평이라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독서 모임도 우리의 레이더에 어김없이 잡혔다. ‘유어 리딩 로프트(이하 로프트)’라는 모임이 있었다. 90분 동안 독서를 하고 나머지 90분은 그에 대해 토론하는 독특한 전개 방식을 취하고 있다. 작년 크리스마스 시즌이었다. 우리는 이브를 오붓하게 둘이 보내고 이튿날인 당일에는 미리 신청해둔 로프트에 함께 참여했다. 한적한 카페 같은 라운지에서 따로 또 같이 독서를 하고 가져온 책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시간이 두 사람 모두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온 것일까. 새해부터 ‘문화적으로 재수 없는 한 쌍’인 우리의 컨텐츠 목록에는 로프트가 추가되었고 지금껏 끌릴 때마다 한 번씩 해오고 있다. 노트북을 챙겨야 하는 글쓰기와 달리 책만 가져오면 언제 어디서든 가능한 데이트이기 때문이다.


로프트 이전에 조금 더 일찍 우리의 포위망에 걸려든 모임은 ‘소셜 씨네 클럽(이하 영화 모임)’이었다. 똑같은 영화를 모든 멤버들이 사전에 감상한 이후에 한데 모여서 몇 가지의 질문에 나름의 답을 해보는 형식으로 영화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모임이다. 소재는 다르지만 진행 방식은 독서 모임과 비슷하다. 우리는 극장에서든 OTT를 통해서든 어떤 영화를 둘이서 보고 나면 “재미있었어.”라는 한 마디로 감상을 끝내지 않는다. 영화가 명작이든 졸작이든 상관없다. 우리는 작년에 마블 스튜디오 희대의 망작이라는 “블랙팬서: 와칸다 포에버”를 보고는 러닝타임과 맞먹는 시간인 3시간가량을 신나게 혹평을 나누는 데에 썼다. 이 일화는 어떤 영화로든 어디서든 우리가 2인 영화 모임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담고 있다.


비단 취미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대화할 때의 화법 역시 아그레의 소울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아그레 모임 특유의 싸우지 않고 상처 주지 않는 둥글고 온화한 화법 말이다. 우리는 충돌이 생겼을 때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며 싸우는 대신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한다. 그래서 가능한 한 발전적인 방향으로 결론이 나도록 합의를 이끌어낸다. 그 과정에서 진지하고 심각한 주제들이 오가거나 복잡한 감정들을 나누기도 하지만 어느 한 사람이 화를 참지 못해 급발진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아마 너에게 물어봐도 똑같은 대답이 나오겠지? 그래야 하는데) 딱히 우리의 성품이 훌륭해서가 아니다. 아그레의 영향이 없다고는 말을 못하겠다.


우리는 글쓰기 모임에서 처음 만나서 영화 모임에 참여하며 본격적으로 친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커플이 된 후에는 독서 모임에 함께 참여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야말로 아그레라는 소셜 모임이 맺어준 인연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모임에 계속해서 나갈 것이고 설령 모임이 없더라도 위에 나열한 것과 같은 2인 소셜 모임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만약 그전까지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모임 방식이 레이더에 잡힌다면 주저 없이 따와서 우리의 데이트 목록에 넣을 것이다. 그러니 이쯤에서 너의 농담 속 표현을 바꿔야겠다. 아그레는 우리가 먹은 게 아니라 바람직한 벤치마킹 대상이라고.


(2023. 3. 21.)

이전 06화 여자친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