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시를 쓰게 하는 사람의 존재
글 쓰는 사람들만 모인 단톡방에서 엊그제 썼던 내 글이 시적이라는 평을 들었어. 최고의 찬사 중의 하나였지. 나는 글을 쓸 때면 언제가 되었든 단어, 그리고 단어와 단어 사이를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거든. 그리하여 내 글에서 언어가 최대한 아름답고 정교하게 직조되기를 바라면서. 그렇기 때문에 내 글이 시와 같다는 이야기는 내심 언제나 듣고 싶어 하는 말이기도 해. 이보세요, 저 앞으로 더 좋은 글도 쓸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 얘기 한 번만 더 들려주시면 안될...까요. 그런데 이거 아니? 그게 다름 아닌 너 한 사람을 위해 쓴 글이라는걸. 호평 같은 것 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오로지 너만 생각하면서 쓴 글인데 과분한 칭찬을 받고 말았어. 그러니까 오늘 나와 내 글이 받은 찬사는 오롯이 너로 인한 영광이라고 여겨야 할 거야. 시라니. 내가 시처럼 글을 쓰는 사람이라니.
오늘도 글을 하나 더 쓰려고 키보드 앞에 앉아서 늘 그렇듯이 음악을 틀어. 오늘의 BGM은 "LUCY"라는 국내 밴드의 노래들로 정했어. 오늘 난생처음 들어보는 밴드의 음악인데도 뭔가 익숙하고 반가운 느낌. 내가 너를 만나기 이전에 줄곧 붙박여서 듣던 해외 락 음악 밴드 중에서 과연 어떤 뮤지션이 LUCY와 비슷하려나. 그나저나 어젯밤에도 새로운 플레이리스트가 잔뜩 생겨버렸어. 전부 다 오늘 새벽에 네가 윈도우 메모장에 적어서 내게 준 노래들이거든. 저번달에 어느 호숫가를 걸으면서 네가 나한테 하나하나 설명해 준 9개의 밴드도 아직 완전히 도장깨기 하진 못했는데, 뭔가 엄청나게 많은 선물상자가 한꺼번에 나한테로 쏟아져내린 기분이랄까. 나는 너로 인해 시처럼 글을 쓰고, 너로 인해 그전까진 들을 일이 없었을 새로운 음악을 듣고 있어. 네가 내게 안겨다 준 선물상자들에 파묻혀, 나는 천진난만한 꼬마 아이처럼 즐거운 헤엄을 치고 있는 것 같아.
엊그제는 잠깐 비가 왔었어. 너는 추적추적 내리던 가을비 사이로 어딘가 향하고 있었다고 했어. 비를 뚫고 도착한 곳은 선물을 포장하는 가게였고, 너는 거기서 3주 후 내 생일 때 내게 줄 선물을 포장했다지. 그곳으로 가는 동안에 네가 들었던 노래가, 다름 아닌 내가 받았던 플레이리스트 안에 있다고 했어. 내가 요즘 들어 낭만적인 사랑에 관한 책을 많이 찾게 되는 것처럼 너 역시 낭만적인 사랑 노래를 많이 찾게 된다면서. 빗속의 너를 떠올리면 초여름 언젠가 네가 길 위에서 내게 잠시 우산을 씌워주었던 생각이 나. 횡단보도에서 길이 갈라졌고, 정류장에 앉아 내 버스를 기다리다가 마지막으로 버스에 탄 너와 눈이 마주쳤어. 그리고 너를 태운 버스는 내가 가야 할 길의 반대 방향 차선으로 미끄러져 사라졌지. 이제 언젠가 비나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너와 우산을 다시 같이 쓸 수 있을까. 하나의 우산 아래 하나의 공간을 나누면서.
나를 위해 빗속을 걸어 선물을 포장해왔고, 그 길에서 어떤 노래들을 들었다는 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글을 하나 쓰고 싶어졌어. 나는 나의 화려한 슬픔과 빛나는 어둠, 고요한 죽음을 먹이 삼아 글을 하나씩 불려왔던 사람. 그런 글도 괜찮았지만, 왠지 나 자신을 깎아서 글을 써낸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더라고. 하지만 지금은 정말로 소중히 손안에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나를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너의 존재가 내게는 너무나도 크고 대단한 거야. 애초에 예술을 하고 뭔가를 창작하고 글을 쓴다는 건 내가 관심이 있고 사랑하는 대상을 향하기 마련이잖아. 내가 만일 시 같은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의 낭송은 너라는 청자를 상상하며 이루어지겠지. 네가 어느 날의 가을비 속을 걸으며 낭만적인 사랑 노래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언제까지나 나를 예쁘게 아껴주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나도 언제까지나 언어를 짜고 잇는 직조공으로 살아갈 거야. 너를 위해 시를 쓸 거야.
(2022. 10.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