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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어캣 Sep 14. 2023

여자친구

저랑 연애해주실래요?

올 가을 10월 9일은 나와 내 애인이 정식으로 사귀기 시작한 기념일이다. 우린 심지어 고백이 이루어진 정확한 시간까지도 서로의 핸드폰에 저장해두고 있다. 그날의 데이트 계획은 내가 그가 사는 동네로 가서 마사지샵, 타로샵, 카페 등등의 로컬 코스를 돌아다니는 일정이었다. 그런데 그 데이트가 있기 전날 밤에 그가 내게 보냈던 카톡 메시지가 있었다.


"제가 잘 아는 가게들인만큼 우리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 들어올지 모릅니다. 어떻게 소개되길 원하세요?"


어떻게 소개되길 원하냐니. 뭐라고 대답하는 게 좋았을까. 애초에 먼저 다가갔던 사람은 나였고 처음 손을 잡자고 제안한 사람 역시 나였다. 당시 썸이라는 것을 제대로 타고 있던 우리의 관계는 굴곡 없이 순조로웠지만, 냉정하게 따져보면 아직은 아무 사이도 아니며 그대로 아무 사이도 아닌 채로 끝나버릴 수 있다는 얘기가 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위의 질문에 뭔가 방향을 정해서 대답을 해야 했다. 그렇게 마음먹자 내 안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이제까지도 용기를 내서 여기까지 온 마당에 한번 더 용기를 낸다고 해서 일이 크게 틀어지기라도 하겠냐고. 나는 대답했다.


"저는 당연히 여자친구라고 소개되고 싶지만, 제량님 부담가지 않는 선에서 결정해주세요."


그리고 그날 아침이 밝았다. 나는 버스 안에서 카톡으로 그가 오랫동안 즐겨온 콘솔 게임에 관한 대화를 함께 나누며 그가 사는 지역까지 올라왔다. "스타크래프트 2: 공허의 유산" 이야기를 나누며 점심을 먹었고, 카페에서 그가 가져온 아이패드로 내가 자주 가던 서울의 유명한 찻집들 사진을 같이 보며 시간을 보냈다. 이윽고 그가 미리 예약해둔 마사지샵에서 2인실의 침대에 각각 나란히 누워 발 마사지를 받던 도중이었다. 아마도 그를 지금껏 많이 봐왔을 거라고 예상되는 분이 그에게 물으셨다.


"동생이야, 여자친구야?"


그는 즉시 대답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여자친구입니다."


그의 즉각적인 대답은 그 다음 갔던 타로샵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두분의 관계는 어떻게 되느냐는 타로 마스터 분의 질문에, 그는 역시나 곧바로 내가 자신의 여자친구이고 자신은 나의 남자친구라고 우리 두 사람을 소개했다. 연이은 대답의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나는 그가 그 단어를 입밖에 내기까지 어떠한 망설임이나 짧은 침묵의 순간조차 없었다는 사실에 무엇보다 기뻤다.


사실 그때 우리는 이미 손을 잡고 다녔고, 마침 각자의 휴가 기간이 묘하게 맞물려 어마어마한 통화량을 매개로 한 친분을 빠르게 쌓아나가던 중이었다. 그리하여 10월 9일 당일에는 거의 사귀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을지 모른다. 그런 상태에서 내가 너의 여자친구고 너는 나의 남자친구라고 확실하게 선언하는 일은 당장 물리적으로는 별다른 차이가 없어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단지 언어로써 관계를 재정의하는 행위인 '고백'에서부터 얼마나 따뜻하고 행복하고 즐거운 기적들이 시작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세상 누구라도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사소하면서도 위대한 찰나의 고백에서부터 말이다.


그날은 비가 하루종일 내렸다. 우산을 함께 쓰고 도착한 버스 정류장에서, 길 건너편의 건물 쪽을 한동안 말없이 응시하고 있던 그는 별안간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지극히 평범하지만 그만큼 명료해서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는 문장이었다.


"유하님, 저랑 연애해주실래요?"

(2022.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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