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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어캣 Sep 14. 2023

지는 게임

왜 꼭 이겨야 하는 걸까

알 수 없는 알고리즘에 따라 유튜브 영상 하나가 추천 목록에 떴다. "기선 제압"이라는 글자가 화면 중앙에 커다랗게 떠 있는 영상이었다.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연애 초반에 반드시 해야 할 일". 누군가는 자극적인 썸네일과 제목의 조화가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해서 영상을 클릭할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사랑의 시작이라는 상황 한가운데 있는 나는 영상의 존재만을 인식한 채 그저 스쳐지나갔다. 자칭 연애 전문 상담가라는 그들의 컨텐츠는 때론 안듣느니만 못한 시시콜콜한 조언들로 가득할 터였다. 내가 이미 들은 바도 여러 차례 있는. 그 조언들이란 대개 이런 것들이다. 초반에 너무 힘주지 마라. 더 좋아하는 사람이 을이다. 애정 표현을 적당히 아껴라. 너무 지나치게 기 세워주면 안 된다. 나는 심지어 다음과 같은 졸렬한 조언조차 들은 바가 있다. 연락이 오거든 무조건 5~10분이나 그 이상 뜸들이다가 답해라. 애태워라. 방법이야 어찌됐건, 애태워서 너를 더욱더 원하게 만들어라. 그런 조언들은 대부분 흔한 공포 마케팅과 비슷한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 전제란 이러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는 연애라는 게임에서 지게 될 것이다" 또는 "네 연애는 지는 게임이 될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유의 계산에 소질이 없기도 하거니와 결정적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그렇게 얕은 수를 써가면서 대하기가 싫다.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만일 저렇게 복잡하게 셈해서 애태우고 절박하게 만들고 나서야 나를 진심으로 좋아할만한 상대라고 가정한다면, 애초에 그런 사람과는 만나지 않는 게 서로에게 편한 일이 아닐런지. 연애를 시작할 때마다 머리싸움부터 열을 올리는 사람들의 내면 밑바닥에 깔려 있는 심리는 역시 "상처 받기 싫다"일 거라고 생각한다. 혹여라도 자신의 모든 사랑과 열정을 상대에게 건네주었다가 그만큼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아예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는 허탈한 상황을 미리부터 겁내는 것이겠지. 그리하여 사람들은 사랑의 승패를 냉정히 따져서 가린다. 그리고 웬만하면 이기고 싶어한다. 사랑의 기나긴 과정이 얼마나 따뜻한지 혹은 얼마나 시린지 온도의 차이를 놓고 그러기도 하고, 과정은 모두 제쳐버린 채 결과만 놓고 바라보기도 한다. 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은 제로섬 게임이다. 승패가 명확히 갈리는, 이긴 사람이 진 사람의 모든 것을 가져가는, 중간지대가 없는, 그런 게임.


그렇지만 사랑을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기엔 난 항상 뭔가의 아쉬움을 느끼는 것이다. 게임이라 하더라도 왜 하필 이기고 지는 게임으로밖에 표현을 못할까. 우리가 사는 현실의 게임들만 하더라도 좀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둘러보면 승패가 갈리는 게임 외에도 가지각색의 장르가 존재함에도. 가깝게는 "심시티"나 "스타듀밸리"처럼 나만의 도시나 가게 혹은 농장을 가꾸고 키워나가는 경영 시뮬레이션 게임이 있을 수가 있겠다.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처럼 양녀로 들인 아이에게 다양한 미래의 모습을 선사하는 육성 시뮬레이션도 인기 있는 장르다. 즉각적인 승부에 희비가 엇갈리지 않고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게임은 그 외에도 무궁무진하다.  게임이라고 다 같은 게임이 아니니까. 연인과 사랑을 나누는 매 순간마다 승패가 뒤집히는 짜릿한 위태로움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나는 적어도 나의 사랑이라는 게임에선 이기고 지는 사람이 따로 없기를 바란다. 종료 시점 또한 미정이라면 더없이 좋겠다.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플레이어 모두가 윈윈할 수 있는 게임처럼. 결과에 기분 나쁠 일이 없는 화기애애한 게임처럼.


(2022.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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