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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호 Dec 06. 2023

운명을 가장한 가스라이팅

"직업이 '요정'이시라고요?"


"네. 맞습니다."


"그럼 피고는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죠?"


"사물이나 동물을 다른 모습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요?"


"쥐를 말로, 호박을 마차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없던 물건도 나타나게 할 수 있고요. 쉽게 말해서 마법이죠."


"대단하시군요. 그렇다면 마법은 언제 풀려서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갑니까?"


"그거야 제가 원할 때죠."


"그렇군요. 그런데 왜 신데렐라에게는 12시라는 시간제한을 두신 겁니까?"


"그건......."


"여러분, 여러분이 보시기에도 이상하죠? 왜 12시까지만 마법이 유지되게 했을까요? 나머지와 다르게 왜 유리구두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있었을까요? 저는 처음에 이런 가정을 했습니다. 피고가 한 사람의 인생을 가지고 장난을 쳤었다는."


"증거 있습니까? 의뢰인은 그저 순수한 마음에서 돕고자 했을 뿐입니다!"


날카로운 변호사가 목소리가 잠시 장내를 환기시켰다.


"그렇군요.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왜 12시라는 마지노선을 두었던 겁니까? 확실하게 밝히지 못하는 사연이라도 있습니까? 왕자와 신데렐라가 함께 더 긴 시간을 가졌다면 공무원들이 구두를 들고 온 나라를 돌아다니는 불필요한 일 따위는 발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맞죠?"


"네. 그건 그렇죠."


"그나저나 왜 신데렐라를 도와주기로 한 겁니까? 무도회 참석이 진정 그녀를 돕는 행위라고 판단한 근거가 있었습니까?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그저 하룻밤 춤출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에 불과하지 않나요? 만약 왕자가 신데렐라에게 반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녀는 여전히 힘든 생활을 해야 했겠죠. 제가 봤을 때 피고는 운명을 가장한 도박을 했다고 보입니다."


"도박이라뇨? 그리고 둘이 맺어지지 않았다면 다른 방법으로 그녀를 도왔을 겁니다."


"그녀에게 그렇게 집착하는 까닭이 뭡니까? 여기서 신데렐라를 증인으로 모시겠습니다."


신데렐라가 증인석으로 우아하게 걸어 나갔다. 옷 구두 가방 모두 온갖 명품으로 치장을 했고 진한 화장이 조금 어색했다. 하지만 방청석에 있는 여성들은 부러운 듯 쳐다보았고, 그 옆에 있는 남자들은 헛기침을 하며 하나같이 불편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혼자 남겨진 왕자의 눈가에 어딘가 모르게 그늘이 드리웠다.


"신데렐라 씨는 지금 행복합니까?"


"네. 행복합니다."


"왕자와 결혼을 하기 전에는 어땠습니까?"


"무척 불행하고 슬펐습니다."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 건 뭡니까? 당신의 노력이었나요? 아니면 왕자의 눈에 들었기 때문인가요?"


"그거야. 제가 묵묵히 인내하고 버텼으니까......."


"묵묵히 버텼다. 힘든 생활에서 스스로 벗어날 마음은 없었고, 그저 요정이 나타나서 왕자와 맺어주길 기다렸다는 말인가요?"


"간혹 그런 상상을 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바꿔서 생각해 보면 제가 계모나 이복 자매에게 그렇게 구박받을 이유도 없지 않았습니까? 도대체 제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세상에는 당신보다 더 힘든 상황에 처해있지만 그것을 자신의 노력을 통해 적극적으로 이겨내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이런 합리적인 의심을 해 보게 됩니다. 요정인 피고가 왕자에게 마법을 걸어 당신에게 반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로 피고 역시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요."


"재판장님. 지금 검사 측에서는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저 심증만으로 있지도 않은 일을 마치 사실처럼 꾸며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변호사가 악을 쓰듯 따졌다.


"인정합니다. 검사 측. 증거에 기반해서 말씀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재판장님. 이 데이터를 한 번 봐주시기 바랍니다. 피고 요정의 SNS 계정 팔로워 수 변화를 그래프로 그려놓은 것입니다. 신데렐라를 도와주고 나서부터 급격하게 증가하는 것이 보이시죠? 수많은 여성들이 피고와 친해지고자 갖은 방법을 써서 접근하려 하는 실정입니다. 미혼 여성은 물론이고 기혼 여성까지도 열렬한 지지를 보내고 있죠. 팍팍한 현실에서 단번에 벗어나게 해 줄 구세주라면서.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요즘 외모가 아름다운 여성들에게 붙은 수식어가 있죠? 요정 같다는. 이게 다 신데렐라의 동화 같은 스토리 덕분입니다."


"그거야 우연히 그렇게 된 것입니다. 밝혀진 상관관계 전혀 없습니다."


변호사가 다급하게 끼어들었지만 검사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부와 명예를 편하게 얻기 위해 요정을 찾아다니고,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저는 단언컨대 최근의 이런 현상을 만든 것이 바로 저 피고이며 더불어 증인 역시도 공범이라고 보는 바입니다. 선한 사람들을 가스라이팅한 저들의 죄가 가볍지 않으니 재판장님의 현명한 판결을 기대합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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