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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정 Jun 24. 2024

다시 오뚝이처럼

12. 눈물의 미역국, 행복이 머물던 시간


퇴원 후 그는 빠르게 회복했다.  

수술 부위도 잘 아물며 일상생활도 무리 없이 잘해 나갔다.  

통증도 없었고 음식도 잘 먹고 잘 소화했다.  




10주 차, 수술 후 경과를 보기 위해 의사 선생님과 진료가 잡혀 있었다.


항암만 잘 받으면 완치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낙관적인 마음으로 진료실에 들어섰다.


더 이상 우리에게 나쁜 소식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사 선생님은 수술 중 진행했던 간 조직검사 결과가 암이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씀을 하셨다.


조직검사 결과가 번복될 수도 있는 건가?


수술실에서 응급으로 했던 검사에서는 암이 아니었는데, 냉동 조직 슬라이스로 다시 한 검사에서 최종 암으로 판단되었다며, 이후에 한 검사 결과가 더 정확하다고 말씀하셨다.  


전이가 아니라고 해서 안심했는데 결국 그게 전이였던 것이다. PCT에서도 안 보이던 미세암이 도사리고 있었고 그는 간 전이가 진행되고 있던 거였다. 암 환자에게 전이가 얼마나 위험한 예후인지 그때쯤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갑자기 췌장암 4기가 되었다.


우리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생사를 넘나들며 큰 수술을 받고 이제 회복한 그에게 너무 가혹했다.

그의 긴 수술 자국만큼이나 우리의 실망과 상처는 깊었다.



# 그의 눈물, 다시 오뚝이처럼


무거운 마음으로 진료실을 나와 아들 집으로 향했다. 작은아들 생일이기도 했고 서울에서 하루 더 묵을 생각으로 올라왔었다. 그렇게 두 아들이 살고 있는 집으로 갔다. 그는 아들 방에 누웠고 나는 주방으로 나왔다. 마음은 천근만근이었지만 어차피 저녁은 먹어야 하니, 그 와중에 미역을 물에 담그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미역을 담근 물에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데 큰아들이 내 옆으로 와서 말했다.


"엄마, 아빠 울고 계셔..."


그도 아들 방에서 소리 없이 혼자 울고 있었다.

바위처럼 단단해 보이는 그였지만 그 상황에 누구도 초연하긴 힘들었다.


"훈아, 어떡해. 아빠 불쌍해서 어떡해..."

같은 말만 계속 반복하고 있는 내 등을 토닥이며 큰아들이 말했다.


"아니야 엄마, 아빠가 왜 불쌍해. 괜찮을 거야, 치료받아서 나으면 되지. 

상황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지 결국 이겨내실 거야. 

아빠 앞에서는 좋은 얘기만 하자. 그래야 아빠도 더 힘내지"

당연하다는 듯 힘주어 말하고 있었지만 아들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광야에 내던져졌지만 주저앉을 수 없었다.

내가 그에게 버팀목이 되어주리라 마음먹으며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눈물과 함께 끓인 미역국을 세 남자는 정말 맛있게 먹었다. 고기도 없이 참기름만 넣었는데 국물 한 방울도 안 남기고 다 먹었다. 미역국을 먹으며 우리 가족은 웃고 있었다. "엄마가 끓여준 미역국이 최고"라며 추켜세워 주는 아들들 덕분에, 우리는 미소가 지어졌고 잠시 행복이 머물렀다. 참 신기하게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우리는 넷이 함께 있으면 힘이 저절로 생겼다. 가족은 우리를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서게 하는 힘의 원동력이었다.

                                        


# 12주 차, 시작된 항암


췌장암의 항암 약은 많지 않다.  

혈액종양내과 교수님과 상담 후 그는 "젬아"(젬스타민+아브락산)라는 약으로 첫 항암을 시작했다.

2주에 1번, 투약 시간은 2시간 내외였고, 그 약의 가장 큰 후유증은 메슥거림과 손발 저림 그리고 탈모였다.


항암 후유증에 대해 병원에서 충분히 설명을 들었고 나름 준비했지만, 첫 번째 항암을 기다리며 우린 두려웠다. 그가 항암을 잘 이겨내주길 기도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은 없었다. 

다행히도 걱정했던 것보다 첫 번째 항암을 수월하게 잘 마쳤다.  


별다른 후유증 없이 2주를 보내고 2번째 항암일, 피검사와 X레이 검사를 하고 의사와 다시 마주 앉았다.


"호중구 수치가 낮네요. 약의 양을 좀 조절하겠습니다. 크게 걱정하실 일은 아닙니다."


그렇게 항암이 미뤄졌다.


항암을 하는 환자에겐 호중구 수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호중구는 신체 감염과 싸우는 데 도움이 되는 일종의 백혈구다) 그 수치가 낮으면 항암이 미뤄지거나 수치를 올리기 위해 주사를 맞기도 한다. 항암 약은 암세포뿐 아니라 백혈구도 공격하는 독한 약이었다.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항암 전에 호중구 수치를 올리기 위해서는 영양공급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나는 호중구 수치에 좋은 식단을 만들기 위해 신경 썼다. 그는 항암 중에도 내가 해주는 음식은 뭐든 잘 먹는 편이었다.


그때를 빼면, 이후  6개월 항암 기간 동안 호중구 수치가 떨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3번째 항암 후, 조금씩 빠지던 머리가 뭉텅 빠지기 시작했다. 식사 시간이어서 분주하게 밥을 하고 있는데 그가 혼자 미용실에 다녀왔다. 식사가 다 차려질 때쯤 집 안으로 들어오며 나를 불렀다.


"자기야, 나 머리 밀었어. 생각보다 괜찮네".


그를 보고 처음엔 너무 놀라서 얼음이 되었다. 그의 모습이 낯설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나에게 그가 웃으며 다가왔고, 그의 민둥머리를 신기해하며 쓰다듬었다. 이러나저러나 내 눈에는 너무 고운 그였다.  

그는 두상이 예뻤고, 율 브리너(뮤지컬 영화 '왕과 나'의 주연배우) 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도 싫지 않은 듯했다.


아들들은 그에게 예쁜 비니와 병원을 오가며 편하게 입을 체육복을 선물했다. 아들들이 거금을 들여 사준 비니와 체육복을 그는 무척 마음에 들어 했고, 병원을 오갈 때마다 꼭 착용했다. 두 아들은 언제나 든든한 그의 조력자이자 엔돌핀이었다.

두 아들은 그를 참 많이 닮아 있었다. 얼굴도 목소리도 성품도 붕어빵 그 자체였다.
큰애는 듬직했고 둘째는 애교가 많아 아들 둘을 키우면서도 딸들이 부럽지 않았다. 공부도 웬만큼 잘해서 원하는 대학에 무난히 합격했고, 둘째는 과학고등학교를 조기 졸업하고 1년 일찍 대학에 합격해 우리의 어깨를 으쓱하게 했다.


이후에도 아들들은 그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아빠의 행복 지수를 높여 준다며 학업에 더 매진하여 좋은 성과로 그를 뿌듯하게 했다. 큰아들은 연구하고 있던 논문이 권위 있는 학회지에 게재되었고, 둘째는 공과대학 4학년 올 A 학점을 받으며 성적우수 장학금과 장학 증서를 아빠에게 선물했다.






두 아들의 든든한 응원을 받으며, 그는 2주에 한 번씩 6개월 동안 항암을 받았다.


항암 때마다 도시락을 준비했다. 과일과 야채, 고구마, 간단한 반찬과 밥을 준비해서, 항암 전 기다리는 시간에 병원 식당에서 같이 먹었다. 그는 너무 순한 췌장암 환자여서, 그와 병원에 동행하는 길이 그저 소풍 같기도 했다.


항암을 하는 동안 암은 더 이상 커지지 않았고 그동안 해가 바뀌어 다음 해 2월이 되었다.

규칙적인 운동과 자기 관리로 그의 건강 상태는 양호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항암 후유증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횟수를 거듭할수록 메슥거림과 손발 저림이 심해졌고 가글을 규칙적으로 했지만 입 안도 자주 헐었다.


'언제까지 항암을 지속할 수 있을까' 


그와 나는 밀려오는 걱정 속에서 다른 치료법은 없는지 알아보기 시작했고, 

꽃마을이라는 암치유 센터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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