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사람이 산다,
거기 사랑이 간다

노는(遊)신부의 사순절 ‘함께 걷는 어둠’

by 교회사이


사순절 두 번째 주간 월요일, 걸으며 읽는 마가복음서 (11)


“그들은 바다 건너편 거라사 사람들의 지역으로 갔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시니, 곧 악한 귀신 들린 사람 하나가 무덤 사이에서 나와서, 예수와 만났다. 그는 무덤 사이에서 사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묶어 둘 수 없었다. . . . 그는 밤낮 무덤 사이나 산 속에서 살면서, 소리를 질러 대고, 돌로 제 몸에 상처를 내곤 하였다.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엎드려서 큰소리로 외쳤다. ‘더 없이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두고 애원합니다.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그것은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악한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 . . ‘군대입니다. 우리의 수가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 . 우리를 돼지들에게로 보내셔서, 그것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예수께서 허락하시니, 악한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거의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바다 쪽으로 비탈을 내리달아, 바다에 빠져 죽었다.” (마가복음서 5:2-13)


거기에도 사람이 산다.JPG photo by noneunshinboo


이방인의 지역입니다. 거긴 죽은 자들이 있는 무덤가입니다. 게다가 먹지도 말고 키우지도 말라고 율법이 금지한 돼지를 치기까지 하는 곳입니다. 설상가상, 첩첩산중, 그야말로 불결함으로 겹겹히 쌓인 트리플 악(惡)셀입니다.


그런 무엇 하나 건질 것이 없는 곳, 그런데 무엇을 위해 거길 가셨을까요? 경건한 유대인으로, 율법의 사람으로 있다면 절대 찾지 않을 곳입니다. 길 잘못 든 철 모르는 나그네의 설움도 아니고, 애쓰고 기를 써서 찾아도 쉬이 찾아질 그런 곳도 아니고, 갈 길이 아무리 멀어 설마 이 길이 지름길이라 한대도 그 설마가 수도 없이 사람들 잡은 곳임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네비게이션을 찍어도 왜 굳이 거기를 가려고 하는지 그 속 없는 기계조차 대놓고 물을 판에, 왜 거기를 무슨 이유로 예수께서는 가셨을까요?




사람입니다. 거기에도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도 사랑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도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 높은 곳에서 시작한 그 사랑이 흘러 닿아야 할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눈먼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랑은 낮고 낮은 곳으로 흐르는 그 내리 사랑이기에, 어디 딱 머물 곳, 멈출 곳을 찾지 않는 눈이 먼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넣고 저건 빼고, 이건 맞고 저건 틀리고, 난 옳고 넌 틀리고, 이 길은 가고 저 길은 피하고, 이 사람은 좋고 저 사람은 영 아니고, 그래서 이 사랑은 하고 저 사랑은 말고 하는 그런 가림이 있는 눈뜬 사랑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가림이 없이 모든 우리를 향한 눈먼 사랑입니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가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누가복음서 5:8)


갈릴리 호숫가, 그 거룩한 존재 앞에 선 베드로의 솔직한, 채 자라지 못한 믿음으로 용기도 없고, 하늘의 거룩함과 영광 앞에 두려움과 공포가 앞선 너무도 왜소한 존재로서는 당연한 그런 겸손처럼 있는 떠나주십시오 하는 간청과는 전혀 다릅니다.

거기 호숫가는 살아 있는 것들이 지천인 산 자들의 호숫가이고 낮의 터이고, 여기 무덤가는 죽어 있는 것들, 죽어 있다 하는 것들로 지천인, 빛에는 죽어 있고 어둠에는 살아 있는 밤의 터입니다.

거기 호숫가는 물고기를 잡는 어부가 하나님 나라의 사람을 잡는 어부가 되는 곳이고 살아 움직이는 곳이고, 여기 무덤가는 정말 말 그대로 사람 잡는 곳, 잡은 사람 가둔 곳, 꼼짝이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거기 호숫가처럼 여기 무덤가에도 사람이 살고 있어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찾아 왔습니다. 죽은 자의 땅에 산 자가 있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산 자의 땅에 죽은 듯 있어야 할 어느 이유도 없다, 그리고 그 땅이 죽은 땅으로 계속 죽어 있을 무슨 이유도 없다, 아예 죽은 땅이 다시 살아 숨쉬는 땅이 되어야 할 이유는 있다, 모든 곳에 사랑이 있을 이유는 충분하다, 너희가 산 송장, 좀비로 살 이유가 도대체가 없다, 하나님께서 창조 후 좋다 하신 이 땅을 죽은 땅으로 살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그러니 그만 그렇게 살라고 거기서 나오라고 우리의 손 잡아 끌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제발 괴롭히지 말아주십시오. 제발 나를 떠나주십시오.”


괴롭히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닌 내 안에 그 악을, 그 죄를 괴롭게 만드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니 겁먹지 말라고 두려워 말라고 움츠러 들지 말라고 도망치려 하지도 말라고, 떠날 사람은 나에게 온 내가 아니고, 그렇다고 너도 아니다. 떠날 그 놈은 내 안에서 나인 듯 나 아닌 듯, 죽은 듯 살고 있는, 산 듯 죽어 있는 그 악이고 그 죄이니, 그 악에서 그 죄에서 내가 떠나라고, 그 귀신은, 그 악은, 그 죄는 어서 이곳에서 그리고 나에게서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하나님 아들께서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도대체 나와 무슨 관계가 있어 오셨습니까?”


관계입니다.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관계로 인해, 그리고 그 관계를 위해 오셨습니다. 나와 예수님과의 관계,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나와 예수님과 하나님의 그 모든 관계 때문에, 그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그 관계 속 나인 것을 다시 알려주시려고 보여주시려고 확실히 하시려고, 그 일을 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누가복음서 20:37-38)


거기에 사람이 산다 2.JPG photo by noneunshinboo


어릴적 겨울방학, 외할머니댁 뒷동산의 무덤가는 훌륭한 놀이터였습니다. 간 밤 눈이 내려 수북히 쌓인 뒷동산 무덤가는 외삼촌께서 옛다 던져 주신 비닐 비료 포대 한 장으로 금새 저의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이른 아침 뒷편의 외양간 거기 어디 잘 두었던 비료 포대 찾아 들고 여기 애써 올라오셔서 툭 건넨 그 비닐 포대는 외삼촌의 그 무심한 듯 속 깊은 사랑이었습니다. 어젯밤의 그 매섭고 세찼던 눈보라는 이제 눈꽃이 되어 지난 밤 어둔 무덤은 이른 아침 새하얀 눈무덤이 되고, 죽은 이들만 있던 곳이 살아 뛰는 동네 꼬마들의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그 옛날 이집트의 군대귀신들도, 그리고 그 모습을 바꾸어 감추고 세련된 지금 로마의 군대귀신들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건너는 그 갈라진 홍해바다를 저들도 건너겠다 뛰어들지만, 그 바다는 산 자들을 위한 것이지 죽어 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기에 저들을 집어 삼켜 저 먼 검은 심연 속으로 뱉어낼 것입니다. 그 노는 물이 다른데, 왜 저들은 이 쪽으로 오는지, 그런데 왜 우리는 저 쪽으로 자꾸 기웃거리고 또 가려하는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죽어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닌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신데, 그걸 왜 자꾸 버릇처럼 잊고 사는지.


애써 빈 무덤으로 만드셨는데, 더 이상 음습한 이끼와 잡초가 무성한 무덤으로 살지 말고, 그렇다고 회칠한 무덤으로도 살지 말고, 그렇다고 머잖아 질척이기만 할 뿐 지금 놀기에 좋고 보기에도 그럴싸한 새하얀 눈무덤으로도 살지 말고, 이제 눈꽃은 녹아 봄꽃으로 오고 있으니 꽃무덤으로도 말고 그냥 꽃동산 꽃밭에 봄소풍으로 놀고 살고 하라고 하십니다.


김밥에 환타가 그립고 생각나는 봄소풍입니다.

그때 시절에는 왜 굳이 무덤(陵)으로 소풍을 갔었는지 . . .

여전히 그 이유가 궁금한 사순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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