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遊)신부의 사순절 ‘함께 걷는 어둠’
사순절 네 번째 주간 목요일, 걸으며 읽는 마가복음서 (26)
“. . . 멀리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열매가 있을까 하여 가까이 가서 보셨는데, 잎사귀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화과의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 . ‘이제부터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먹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 . . 이른 아침에 그들이 지나가다가,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 버린 것을 보았다. . . . ‘스승님, 저것 좀 보십시오. 저주하신 저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렸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믿어라. . . . 너희가 기도하면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미 그것을 받은 줄로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 . .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어떤 사람과 서로 등진 일이 있으면,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 (마가복음서 11:12-14, 20-26)
‘어느 위대한 예술가를 추억하며’ 라는 부제가 붙은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삼중주곡(Tchaikovsky, Piano Trio A minor, Op 50, ‘In Memory of a Great Artist’)*을 듣습니다.
화양연화(花樣年華). 화려하고 위대했던 한 예술가, 그리고 그의 생(生)을 추억합니다. 이젠 곁에 없는 그를 기억하고, 그의 인생 그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절을 추억하는 여기 남은 자의 슬픔, 그 상실의 아픔이 귀로 듣지만 손에 닿고 눈에 밟힙니다. 그러나 한 위대한 예술가를 추억하는 일은 혼자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세 친구가 만났습니다. 가만히 조심스럽게 서로에게 말을 걸고, 서로에게 귀 기울이고, 서로의 이야기를 그리고 서로의 기억을 꺼내고 나눕니다. 그리고 서로의 이야기에 반응하며, 또 서로를 위로하고 보듬고 안아줍니다. 그렇게 바이올린, 첼로, 그리고 피아노, 세 악기가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한 예술가 그리고 그의 생의 이야기, 그리고 그림을 완성합니다. 그렇게 한 위대한 예술가를 추억합니다.
그리고 여기, 이제는 사라진 한 무화과나무**, 그리고 그 화려했던 시절을 추억합니다. 그러나 한 예술가를 추억하는 피아노 삼중주가 아니라, 그 한 나무를 추억하는 ‘믿음 삼중주’입니다. 바이올린, 첼로, 그리고 피아노를 대신한 기도의 바이올린, 용서의 첼로, 그리고 믿음의 피아노, 그렇게 ‘믿음 삼중주’입니다.
“저것 좀 보십시오, 어제까지 그 잎이 무성했던 저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렸습니다.”
왜 그 무화과나무는 그렇게 하루 아침에 사라졌을까요? 그렇게 잎이 무성하고 화려했던 무화과나무가 왜 저렇게 초라한 뒷모습을 남긴 채 그렇게 빨리 사라졌을까요? 그런데 그 나무를, 그 무성하고 화려했던 시절을 누가 기억은 해 줄까요? 추억 속에 여기를 찾아는 줄까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는 그 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마가복음서 11:17)
하나님의 기도하는 집이 장사치들의 고함소리와 흥정하는 사람들의 악다구니로 난장판이 되어버렸습니다. 기도하는 소리는 짤그랑 동전 떨어지는 소리에 파묻히고, 경배와 찬양의 소리는 짐승들의 비명 소리에 들리지도 않고, 높은 곳에 자리를 잡은 예루살렘 성 그리고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은 그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열매를 맺을 기미는 보이질 않고, 거기를 들락거리는 사람들 역시 거기 매달린 잎사귀처럼 위태합니다.***
“선생님, 저것 좀 보십시오, 저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렸습니다.”
식물도 좋은 소리,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면 건강하게 잘 자란다 하는데. 들리는 소리는 왠만한 저잣거리 시장통 보다 더 눈 둘 곳 귀 머물 곳도 없이 시끌벅적 요란하니 어디 제대로 꽃을 피우고 열매인들 맺을 수 있을까요?
“너희는 하나님을 믿어라! 믿음으로 기도해라! 기도 하기 전에 먼저 용서해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
믿음의 피아노의 강물인 듯 자연스레 흐르는 선율, 그 위를 타고 날아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기도의 바이올린, 그리고 저기 깊은 곳 거기 안에서 울려 나오며 따뜻하게 감싸고 든든하게 받쳐주는 용서의 첼로, 그 믿음 삼중주입니다. 그러나 그건 단지 그 화려했던 생을 살았던, 이젠 곁에 없는 한 위대한 예술가를 추억하는 연주곡이 아닙니다. 그 잎만 무성했던 그러나 그 열매를 찾아볼 수 없었던 한 무화과나무, 그 꽃만 화려했던 시절을 추억하기 위한 연주곡이 아닙니다.
추억만 하기에는, 안타까워만 하기에는, 슬픔에만 있기에는,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삼중주곡은 너무 아름답습니다. 마냥 안에서 가만히 앉아 들으며 추억만 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밖으로 푸른 들을 달려, 저기 내리 쏟는 태양 아래 여기저기 피어난 붉고 노란 꽃들과 푸른 잎들 그 사이를 지나, 저기 언덕 그 위 아름드리 나무에 곱게 익어 달려 있는 열매를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열매를 따서 나누어 먹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추억만 할 순 없고, 아쉬워만 할 순 없기 때문입니다.
나에겐 우리에겐 아직 그 화양연화의 시절은 오지 않았고, 지금 여기로 오고 있음을 아는 설렘이 더 크다면, 그 기쁨이 내 안에서 우리 안에서 자라고 있다면, 거기 추억 속에 계속 머물러 있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 무성한 잎이 다 지기 전 서둘러 그 꽃을 피우고, 그 화려한 꽃에 넋을 놓을 사이 없이 때에 맞추어 모두 내려 놓고, 그 열매를 맺어야 할 때를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 잎이 마르지 않기 위해, 그 꽃을 피우기 위해, 그리고 그 꽃을 내려 놓고 그 꽃이 진 자리에 열매를 맺기 위해, 우리에게 믿음, 기도, 그리고 용서의 삼중주가 필요합니다. 더 이상은 초라해질 수 없고, 초라함에 머물 수 없는 무화과나무이기에, 아직 그 무화과나무의 화양연화의 시절은 오직 않았기에, 저기 그 시절이 오고 있기에, 그것을 믿고 알기에, 그래서 나는 시냇가에 심은 그 잎도 꽃도 열매도 무성한 아름다운 무화과나무이기에****, 여기 예수께서 들려주시는 믿음, 기도, 그리고 용서의 삼중주곡을 연주하고 또 살아야 합니다.
그 곡은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께서 들려주시고 가르쳐주신 삼중주곡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악기입니다. 그리고 그 악기의 연주자입니다.
음악과 걷는 사순절입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YOlqDzM0U3g
**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무화과 열매는 이스라엘 민족을, 그리고 말라버린 무화과나무는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비유로 자주 사용됩니다. (참조, 예레미아서 24:1-10, 호세아서 9:10, 이사야서 34:4, 미가서 7:1-4)
***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마가복음서 13:1-2)
**** 시편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