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삼이를 데려오고, 한두 달 시간이 흐르니 여느 강아지와 같이 활발해졌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는데, 늘 터그놀이로 시작하면 흥분하고는 결국 나를 물면서 끝이 났다. 자연스러운 강아지들의 놀이였고, 모견처럼 훈육의 기술이 부족했던 우리는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우리는 긍정교육을 하는 곳을 선택했다. 교육 중에 아내의 임신 사실도 알게 되었다. 어느덧 시간이 흐르고 졸업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늘 그렇듯 졸업이란 새로운 시작을 뜻하는 말이기도 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개훈련이 아니었다. 반려인 교육이었다. 그때의 교육이 있었기에 그나마 괜찮은 것인지, 아니면 그냥 시간이 흘러 이렇게 된 건지 알지는 못하겠지만 나름 잘 지내니 교육에 효과가 있었던 것이라 판단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아이가 집에 오면서부터 친 울타리는 아직도 철거하지는 못하고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이사를 진행했다. 아내와 아이는 산후조리원에 있었고, 나 홀로 이사를 진행했다. 산후조리원에 나온 뒤로는 친정집으로 가서 이모님을 통해 산후조리를 추가로 받았다. 이사비용을 아끼자고 반포장이사로 선택했기에 이사 전날까지 열심히 짐을 포장했고, 이사 와서도 열심히 짐을 풀었다. 이사 전날은 아내와 자주 다니던 곳들을 여기저기 다니며 사진을 통해 실시간으로 아내와 소통했고, 혼자 울컥했다.
물론 틈틈이 조리원에 가서 만나고 돌아왔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매번 코를 쑤시고 결과지를 들고 다녔고, 집에 인삼이가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잠시만 보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친정으로 간 뒤에는 거리가 멀어지면서 더욱 왕래하기 힘들었다. 당시에는 회사도 다녔고, 집안 정리를 하고. 인삼이도 돌보며 약간은 아쉬운 한 달이 빠르게 지나갔다.
본격적으로 가족이 모여 살기 시작했지만, 나는 잠을 설치지 않았다. 나름 다른 아이들보다 순한 아이였기에 타임스케줄에 따라 자고, 먹고, 다시 잤다. 그래서 나는 100일의 기적을 모른다. 오히려 100일이 지나면서 조금씩 불규칙해지는 아이로 인해 조금 피곤해진 것일 뿐이었다.
그저 누워서 헤헤거리던 아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개를 가누고, 엎드리고, 기어 다니고, 일어서고, 걷기 시작하고, 이제는 뛰어다닌다. 대략 10개월 정도 흐른 뒤부터 아내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일찍 어린이집에 출석했고, 병원도 자주 갔지만 큰 병 없이 지금까지 무난히 커준 것에 정말 감사하다. 물론 그 외의 여러 우여곡절을 겪는 우리 가족이지만 이 또한 잘 넘어가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