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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딘 Aug 16. 2024

만 27개월 애, 만 51개월 개,
첫 만남.

아내는 종종 누군가의 팬이 된다. 

그리고, 답정녀이기도 하다.


2018년 6월 6일 우리 부부는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부부가 되었다.


그리고 2년 동안 많은 시간을 함께 해왔다. 관리 따로 적당한 간섭.

그렇게 어쩌면 딩크가 되지 않을지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2020년이 되고 시간은 그냥 흘러가고 있었다.

역시나 적당히 다투고, 화해하고, 처먹는 그런 결혼 생활이었다.

가진 건 서로 아무것도 없었다.

따져보면 거의 하루살이의 삶이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삶.


어느 날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강아지에 대해 말을 꺼내는 아내에게 처음부터 안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연신 얘기를 꺼냈다.

그렇다고 나는 동물을 싫어하는 타입은 아니다.

그저 집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일거리가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반대했다.

오죽했으면 혼자 자취할 때 제일 손이 안 가는 거 키우겠다고, 타란튤라도 키웠을 정도였다.


내 생각이지만 아마 아내의 워너비인 이효리의 영향이었을 것 같다 추측된다.

지금도 이효리가 나온다 하면 찾아보는 정도다.


당시 아내는 필라테스를 하면서도 강사에게 빠져서 다른 곳에서 수업하면 따라가서 수업을 받을 정도로 팬심을 보였으니 근데 살은 안 빠지는 신기한 현상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2020년 4월 하고도 중순이 지나 아내가 인스타그램 게시물(당시 나는 인스타그램 릴스, 스토리, 그런 개념조차 없는 무지렁이였다.)을 보여주었고, 설명을 해주었다.


(오랜 기억이라 기억을 끄집어내어 각색하였다.)

"아는 동생이 있는데, 동생네 본가에 농장을 지키는 개 한 마리가 있었는데...

이번에 새끼들이 태어났데, 아빠가 누군지 모르고, 그런데? 몇 달 전에 새끼들이 또 있었는데, 차에 치여 죽고, 밟혀 죽고, 들짐승이 물어간 거 같기도 하고, 그래서 한 마리도 안 남았다는 거야.

우리가 한 마리 데려올까?"


"... 안돼."


솔직히 귀여웠다. 여기서 내 얘기를 잠깐 해보자면, 난 아주 어렸을 때 집에 개 한 마리가 있었다. 퍼그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 자란 뒤에는 부모님이 시골에 보내버렸다.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두 번째 개 한 마리가 또 있었다. 이번에는 아메리칸 코카스파니엘이었다. 내가 중학생 때라 기억이 꽤 선명하다. 한 마리에 40만 원 정도 했고, 아빠는 이걸 분양해서 돈 벌 생각에 새끼까지 낳았지만 주변 지인들에게 나눔을 끝으로 더 이상 새끼를 낳지 않고, 잘 자라다 내가 군대 갔다가 제대 후 학교 기숙사 가던 길에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만큼 적당히 오랫동안 집에서 살았다. 


문제는 이 와중에 개들을 케어한 것은 엄마의 몫이었고, 아빠의 말로는 개 때문에 엄마 관절이며, 몸이 망가졌다고 하실 정도로 집에 개냄새를 없애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다.


그래서 개 한 마리 들어오면 2~4살짜리 아이를 약 15년은 케어해야 한다고 생각하라는 주변 지인의 말에 극공감했던 터였다.


하지만 답정녀의 고집을 꺾을 힘이 없었다. 가서 보기라도 하자는 그녀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질 말았어야 했지만 그때는 갔다.

그곳의 위치는 경북 영주시 풍기읍에 있는 어느 인삼밭이 있던 곳이랄까.

서울에서 차 끌고 4시간은 내간 것 같다.

뛰기 시작한 어린아이 같은 강아지들이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었다. 겁도 없는지 차가 들어가도 그냥 뛰어나왔다. 엄마는 묶여있으니 강아지들 케어는 당연히 못하고 있었다.


강아지들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처음에는 직접 보자는 아내의 말에 두 번째는 나에게 달려온 한 마리의 강아지에게, 

세 번 약해졌음 지금 개가 두 마리였을 것이다.

첫 만남 뒤 데리고 오는 차 안 아내 배 위에서 곤히 잠든 인삼이다.

그렇게 인삼이와의 첫 만남에 그냥 데려오게 되었다.

모질지 못한 나를 탓해야지 뭐. 이제와 고민해 봐야 소용 업다.

그저 끝까지 책임져야만 한다.


데려오고서는 1년 하고도 몇 개월 더 흘렀다.


2021년 8월 15일

명확한 두 줄.

아마 전날 아내가 사 오라고 한 테스트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음날 아침 광복절이라 느긋하게 늦잠을 자고 있던 내게 내밀던 두줄 뜬 테스트기였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가 아빠가 된다는 것이. 리액션을 해주지 못했다. 대신 그냥 안아주었다.

여기에다 적는 글이지만 속으로는 기대감은 40% 걱정이 60%였던 것 같다.


부모가 되겠다 준비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겠지만 우선적으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가 좀 걱정이었다.

모아둔 돈도 없고, 쓰기 바쁜 우리였는데, 지금의 습관들을 갑자기 바꾼다고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우선은 그냥 살기로 했다.


사진 속 하트 모양이 아기집이다.

매번 병원에 가서 아기집도 확인하고, 이후에는 꼬물거리는 것도 확인했다.

아내 뱃속에 있으니 배가 불러감에도 솔직히 아빠라는 느낌은 별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냥 신기하다고만 생각했다.

엄마에게 말씀드리자 첫 손주였기에 축복이라고 불러주셨고, 그대로 태명이 된 '축복이'가 되었다.


2022년 4월 28일

시간은 금세 흘러 예정일이 다가왔다. 우리는 병원으로 향했고, 반응이 없던 아내에게 의사 선생님은 유도제를 투여했다. 아내는 호기롭게 무통도 안 맞겠다 했지만 첫 반응에 바로 무통을 맞았다.

시간은 흘렀고, 본격적인 진통이 시작된 듯 보였다. 머리가 보인다는 얘기와 함께 아이는 무사히 태어났다.

이러기 전부터 내 눈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었다.


오후 5시 23분, 2.98kg, 신장은 50cm.

건강한 아이가 태어났다.


난 이미 오열 중이었고, 아내 가슴에 엎드려 숨을 쉬는 아이의 모습과 안심하며 아이를 쳐다보는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정신없이 울면서 아이와 아내에게 준비한 편지도 읽어주었지만 손에 힘이 풀린 나는 더 이상 사진을 찍거나 영상을 찍을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아내는 그런 나를 한심하게 봤을까? 적어도 왜 저럴까라는 생각은 했을 것 같다.


지금 보니 이때가 내 울음버튼이 눌리기 시작한 때인가 보다. 이때부터 내 삶은 달라졌다. 아이와의 첫 만남 뒤로 50일, 100일, 첫돌을 지나 두 돌까지 지난 이 시점에 까지 그래도 이미 많은 추억을 쌓고 있지만 앞으로 쌓아갈 더욱 많은 추억들에 기대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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