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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대 Oct 22. 2021

우다, 사랑하는 우다

풍요이야기

오늘 가을 하늘이 참으로 청명하다. 구름 색깔 또한 밝아서 새 파란 하늘색의 채도가 더욱 깊어 보인다. 

풍요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을 가을 햇살을 받으며 정리하고 싶어서 집 뒤편 텃밭의 나무 의자로 공책과 샤프연필을 들고 나왔다. 


가까이에서 새소리가 들리고 먼 곳으로부터 예초기 소리가 들려온다. 건너편 밭 감나무에는 노랗게 익어가는 단감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등에서는 가을 햇살의 온기가 느껴진다.


지금 내가 듣고, 보고, 느끼는 세상의 전부이다.

내가 개입하지 않아도 저절로 펼쳐지는 세상이다.

그리고 단순 명료해서 의문이 없는 세상이다.


그 세상에 풍요가 나타났다. 그 녀석은 내가 쓰고 있는 이야기 속에서 뛰쳐나와 나를 향해 걸어오더니 방향을 살짝 틀어 나와 약간의 거리를 두며 우회하여 작은 나무에 굵고 길게 세찬 오줌을 쏘았다. 평소에 영역 표시용으로 몇 방울 찔끔 흘리던 그런 방뇨가 아니었다.

그 나무는 퇴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와 경주 산골에 있는 작은 농원에서 데려온 팥꽃나무였다.


나는 ‘저 녀석이 왜 하필이면 내가 아끼는 나무에 오줌을 싸지?’라고 의아해하는 순간 한 생각이 불쑥 솟아올랐다.

아마 나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나 아닌 누군가의 생각이 내 의식의 한가운데를 두들겼을 것이다. 

그 생각은 <우다>에 관한 것이었다.

우다는 풍요 아들 이름이다.


나는 오줌을 싸고 복숭아 밭으로 걸어 들어가는 풍요를 향해 “야! 풍요, 풍요야!”하고 소리쳤으나 녀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이야기 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등 뒤에서 따스한 가을 햇살의 온기가 느껴졌다. 

‘저 녀석, 자기 아들 이야기를 좀 제대로 하라고 나를 찾아왔군’


풍요는 아마 지금 이야기 속에 들어앉아 아들 우다를 기다릴지도 모른다.

내가 약간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고 들었던 것들을 부지런하게 종이에 적어 나간다면 풍요는 사랑하는 자기의 아들 우다를 좀 더 빨리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풍요 이야기>가 좀 더 길어지게 되었다.


내가 풍요 아들을 처음 본 이후, 나는 풍요를 볼 때마다 “풍요야~ 니 아들 잘 있나? 우리 집에 좀 데리고 온나” 하면서 애걸하다시피 온 얼굴에 주름 잡힌 미소를 띠고 온화한 말투로 풍요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풍요는 나의 호들갑에는 별다른 관심은 보이지 않고 사료만 다 먹으면 시급한 중대사가 있는 것처럼 신속하게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수시로 ‘니 아들도 밥은 먹어야 될꺼 아니가? 어데서 밥 먹는 데는 있나? 좀 데리고 온나“라고 했지만 별다른 소용은 없었다.


아내는 아마 풍요가 자기 아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 집에 안 데려 올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뭐라꼬? 풍요가 우리 가족들을 못 믿는다 말이가?”라고 하면서 설마 풍요가 그럴 고양이는 아닐 것이라고 아내에게 힘주어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내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풍요가 우리 가족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우다를 자신 만의 온전한 보호 아래 두고서 방해받지 않는 충만한 가족애를 느끼고 싶어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째던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 가족의 기대에는 못 미치지만 상황이 나아지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 풍요 아들이 우리 집 근처에 출몰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가족들은 그 녀석이 나타나면 “와~ 풍요 아들이다”하고 환성을 지를 수는 있었으나 사진은 찍지 못했다. 휴대폰이 손 끝에 닿기도 전에 시야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신출귀몰한 녀석이었다.

그 녀석은 잠시라도 정지한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쉴 새 없이 뛰고, 또 뛰었다.

뛰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네 발이 땅에 닿지 않고 지면 위의 허공을 밟고 달리는 듯했다.

그 녀석은 그렇게 쳐다보는 사람들의 정신이 혼란스러울 정도로 “우다닥, 우다닥”거리며 온 사방을 뛰어다녔다. 누가 보더라도 선명한 캐릭터를 가진 녀석이었다.

막내아들이 그 녀석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다.

<우다>였다.     


어느 날 풍요가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드디어 우다를 데리고 우리 집 베란다로 올라왔다.

물론 그곳은 풍요가 원하기만 하면 먹고 잘 수 있는 자신의 집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내는 우다의 사료 그릇으로 내가 좋아하는 작은 도자기 접시를 내놓았다.

풍요가 어린 아들과 나란히 식사하는 모습을 보며 떠오른 단어들은 생명, 아름다움, 따스함, 평화 그리고 함께 함이었다.


풍요는 늘 우다와 함께 다녔고 집 뒤편 포도밭에서도 자주 놀아 주었다.

그 무렵 풍요는 가끔 육아에 지친 표정을 보이기도 했지만 눈에는 생기가 돌았으며 앉는 자세나 걸음걸이가 의젓하게 보였다.

풍요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절일 것이다.     


어느 날부터 사료를 먹으러 풍요와 같이 오던 우다가 보이지 않았다.

신출귀몰한 녀석이 출몰하지 않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우리 가족들의 걱정이 시작되었다.

급기야 막내아들이 마을 입구 앞 도로를 우다닥 건너다가 차에 치여 죽었을 수도 있다는 가장 극단적인 추측을 내놓게 되었고 둘째 딸이 “그럴 수도 있겠네”하고 맞장구를 치자 그 즉시 아내는 “아이고~ 우짜노”라고 탄식하면서 추측을 현실로 만들어 버렸다.

나는 추측과 현실의 중간 지점에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망설이면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풍요가 혼자 다니는 것을 볼 때마다 더욱 측은해 보였다.

‘가령 우다가 죽었다면 풍요가 그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는 풍요를 쳐다보는 것이 왠지 미안했다.    


최근의 일이다.

우다의 죽음을 추측으로 내놓았던 막내아들이 이번에는 살아있는 우다의 현실 소식을 들고 왔다. 

어느 날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자마자 다소 흥분된 큰 목소리로 “우다, 살아있어요”하면서 방금 마을 입구에서 우다가 우다닥 뛰어다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아내는 그 즉시 “아이고~ 잘됐네”하면서 가슴 중앙에 두 손을 합장하며 감격하고 또 감격했다. 역시 아내의 반응은 직감적이면서 속도감이 좋았다.


나는 풍요가 우다와 함께 우리 집에서 식사를 했던 모습을 떠올리며 아내에 물었다.

“우다는 이제 우리 집에 영영 안 오는 건가?”

아내는 “풍요가 우다의 아빠이기는 하지만 풍요만의 영역이 따로 있기 때문에 같이 못 있을 거예요”라고 했다. 


'그런가?'

.

.

.

'그럴 수도 있겠지'

'고양이는 부모와 자식 간에도 영역싸움을 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어'

'우다는 스스로 독립했을 수도 있고, 풍요가 독립시켰을 수도 있겠지'

'음~~~ 그렇군'


이제 풍요에게 몇 장의 사진과 짤막한 메모를 남기고 <풍요 이야기>를 마쳐야겠다.


풍요야. 

나의 친구 풍요야.

아저씨는 네가 우다와 떨어져 살더라도

서로 사랑하고 자주 만나면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알았제?

혹시라도 우다를 만날 수 없게 되면

언제든지 <풍요 이야기> 속으로 들어오너라. 

네가 사랑하는 우다는 늘 거기에 있다.

그리고

<풍요 이야기>는 네가 쓴 책이다.

아저씨가 오래도록 소중히 잘 간직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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