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하는 행위의 소중함
여러 예술 중 태어나기도 전에 가장 처음 맞닥뜨렸던 것은 음악이다. 반평생 피아노와 다른 악기를 배우고 가르쳐온 엄마를 통해 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태교로 정제된 클래식 음악 소리가 아닌 엄마가 직접 건반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연주회를 하며 쉴 새 없이 두드린 건반의 전율이 혈관을 타고 흘러 나에게도 왔다. 물론 나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말이다.
음악이 듣는 행위를 넘어하는 행위로 바뀌게 된 순간이 있다.
5살 때 내 손이 피아노에 닿았고, 6살 때부터 엄마께 피아노를 배웠다. 지금 피아노 치는 것은 재미있지만 그 당시 어릴 적 나에게 피아노란 놀이시간을 뺏는 강박적 활동이었다. 피아노를 쳐야 할 때면 1시간 동안은 꼼짝없이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서 손가락의 움직임, 한계가 보이는 집중력, 참을 수 없는 그림 욕구와 싸워야 했다. 악보는 낙서로 가득 찼다.
피아노를 즐기게 된 계기는 모순적이게도 피아노를 그만두고 나서부터였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엄마의 권유로 오케스트라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치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자율적으로 피아노를 칠 수 있게 되자 오히려 피아노에게 자주 다가갔다. 또 하고 싶은 노래 악보를 스스로 뽑아서 연주하니 더 재미있었다.
오케스트라에서 내가 맡은 포지션은 플루트였다. 사실 처음에 플루트로 오케스트라 활동을 한다는 것이 나는 끔찍이도 싫었다. 플루트는 피아노와 마찬가지로 하고 싶어서 시작한 악기가 아니었다. 피아노는 건반을 때리면 우렁차게 소리라도 났지만 플루트는 처음에 소리 내는 것조차 고난이었다.
8살 때 엄마의 레슨에 따라가 우연히 접하게 된 플루트는 피아노와는 확실히 다른 맛이 있기는 했다.
목관악기인 플루트는 호흡과 입술모양을 바르게 유지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연주 내내 쉴 새 없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어야 하는데, 호흡 타이밍을 놓치면 곧바로 숨이 막히고 올곧은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연주할 때면 늘 삑사리가 나기 일쑤였고, 하도 숨을 반복해서 깊게 내쉬다 보니 머리가 아팠다. 엄마의 성원에 못 이겨 잘 못하더라도 그만두지 않고 꾸준히 연습을 이어갔다. 하지만 원해서 시작한 게 아닌 플루트는 도무지 애정과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과외 선생님이랑 함께 부를 때를 제외하고는 늘 혼자서만 불러보다가 중학교 1학년때 처음으로 사람들과 함께 '합주'라는 것을 해보았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거부 반응이 극에 달하던 시기라 오케스트라를 하겠다고 결심하기 까지도 쉽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한번 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렇다 할 목적이나 사명은 없었고 단순히 엄마의 권유에 대한 복종이었다.
오케스트라는 모두 청소년들로 이루어져 있는 청소년 오케스트라였고, 지휘관님을 비롯한 파트별 악기 선생님들이 있었다. 처음 한 달간은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갑자기 악보를 같이 보며 함께 연주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어색했지만 다행히 곧 편안해졌고, 단원 친구들과도 친해졌다.
합주를 하면 해보기 전까지는 몰랐지만 엄청 두근거리는 순간이 있다. 바로 무대 시작 전에 튜닝을 하는 순간이다. 막상 무대 위에서 연주를 하고 있는 중이면 악보를 집중해서 보고 틀리지 않게 연주하려고 정신이 연주 그 자체에만 몰두해 있다. '튜닝'은 본 프로그램을 연주하기 전에 악장의 주도에 맞춰 모든 연주자들이 각각 기준음에 맞추어 소리를 내며 음을 맞추는 조율 시간이다.
이때 오보에를 필두로 악기들의 소리가 겹겹이 쌓여 하나의 거대한 화음을 일으키게 된다. 악기들이 하나둘씩 제 차례에 소리를 내갈 때 나도 플루트를 꽉 잡으며 내 차례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 기다리는 시간은 몇 초 남짓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 심장 박동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 운지에 맞게 바람이 새어나가 나게 될 소리들, 지휘자님의 음악에 취한 눈빛, 설레는 도입부와 감정의 격동이 묻어 나오는 엔딩까지 앞으로 펼쳐질 곡들의 향연이 스쳐 지나가면서 마음이 경건해졌다.
본 부대 전 튜닝에서는 이런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무대에서도 그렇고 연습할 때도 그렇고 합주를 잘 해냈을 때의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악기를 연주하면서 감동의 감정을 느껴본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동안 꽤 많은 시간 동안 피아노를 비롯한 여러 악기를 해보았지만 하면서 감동은 느껴보지 못했다. 곧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즐기기 시작했다.
이런 게 합주를 하는 맛인가..?
'악기'는 무작정 많이 연습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연주할 때의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계적으로 연습하던 악기가 처음으로 인간의 숨결이 담겨있는 인간다운 것으로 느껴졌다.
오케스트라를 그만두고 더 이상 악기에 대한 강요가 사라졌지만 여전히 악기를 연주한다. 이제는 배우기를 원하는 악기도 생겼다.
무엇보다 음악을 하는 행위에 애정이 간다. 엄마가 그렇게나 악기를 권유한 이유를 지금은 알 것도 같다.
이렇듯 감동과 짜릿함을 느낀 찰나의 순간들이 현재까지도 음악을 하는 행위를 즐기게 하고 삶을 보다 생동감 있게 살아갈 힘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