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가문의 비밀 2
“딸아, 우리 가문에 내려오는 비밀을 너에게 말해 줄 때가 되었구나!”
“헤헤, 아빠 설마 우리 집이 포스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드라마나 영화에 흔히 나오는 대사가 정일의 입에서 나오자 참이도 영화 속 대사를 읊었다.
“포스?”
“죄송. 스타워즈에 나오는 거 한 번 흉내 내 봤어. 아빠가 꼭 영화처럼 말하길래.”
“아!, 그 포스. 뭐 비슷하구나. 우리 집 안도 일종의 포스를 쓸 줄 안단다.”
“예? 에이 아빠 왜 그래? 재미없어.”
“사실 우리 집에는 말이다…….”
“아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을 처단하는 호랑이를 모시는 집안이라고?”
“그래 바로 믿기는 어렵겠지. 하지만 진짜야. 우리 정 씨 집안은 저 옛날부터 백범님을 모셔왔어.”
“하지만 아빠는 그냥 평범한 찻집 주인이잖아. 나는 아빠가 누구랑 싸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여전히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는 참이에게 정일이 다시 한번 설명을 하려다가 침상으로 참이를 이끌었다.
“그건……아니다. 직접 네 눈으로 봐. 이 분이 생각나지 않니?”
정일이 커튼을 걷자 눈을 감고 자고 있는데도 조각 같은 미남이 보였다. 2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는 긴 검은 머리와 하얀 얼굴, 붉은 입술도 비범해 보였지만 가장 특이한 것은 하얗고 긴 눈썹이었다. 정일이 다시 물었다.
“참아, 네가 어린 시절에 삼촌이라 부르며 귀찮게 따라다니고는 했는데. 생각 안 나?”
정일의 말을 듣고 자세히 보던 참이도 누워있던 이가 떠올랐다.
“아아~, 그 삼촌이네. 어? 그런데 하나도 안 늙었네. 설마 이 삼촌이 그 호랑이?”
참이는 누워 있는 그를 보자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 했던 추억이 떠올랐다.
엄마랑 어린이 대공원에 가서 처음으로 코끼리도 보고 원숭이도 보고 회전목마도 탔던 날이라 참이는 더 생생하게 기억했다. 너무나 행복하게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가 지붕 위에 있었다.
“백범님! 저희 다녀왔어요. 곧 식사 준비할 거니까 내려오세요.”
엄마가 두 손을 흔들며 그에게 인사했고, 답하기 전 이 삼촌은 살짝 고개를 돌려 무언가를 닦아내곤 엄마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기심 가득한 참이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삼촌 울어?”
살짝 당황한 엄마가 가만히 참이를 바라보다 무릎을 꿇고는 참이의 손을 가만히 잡으며 말했다.
“참아, 어른도 아프면 울어. 삼촌이 오늘 많이 아프신가 봐. 그리고 엄마가 부탁이 하나 있는데 울 참이가 들어줄 수 있을까?”
작은 주먹을 들어 야무지게 가슴을 치며 어린 참이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엄마, 나 일곱 살이야. 다 해줄 수 있어.”
“호호호, 그래. 나중에 나중에 말이야 삼촌이 또 많이 아파 울게 되는 일이 있을 거야. 그때가 되면 울 참이가 삼촌 아프지 말라고 쓰담쓰담해 줄 수 있어?”
“응, 엄마. 내가 쓰담쓰담해 줄게.”
“아유 우리 참이 너무 예쁘다. 꼭 부탁해!”
엄마는 참이를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꼭 껴안고 한참을 있었다. 그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방으로 가서 텔레비전을 보며 쉬라고 했었지만, 참이는 다락으로 올라갔다.
‘오늘도 삼촌이 아프니 호오 해 줘야지.’
다락창을 열자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삼촌?”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흠칫 놀란 삼촌이 뒤를 돌아보자 참이가 손짓으로 그를 불렀다.
“내려가라.”
삼촌이 말했지만 들을 생각이 전혀 없던 참이는 꽤 높은 창턱을 넘으려 낑낑거렸다. 그러자 한숨을 내쉰 삼촌이 다가왔다.
“왜 그러는 거니? 여기 나오면 엄마한테 혼날 텐데.”
삼촌의 으름장도 목표의식 뚜렷했던 참이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온 삼촌에게 고개를 숙이라고 한 참이는 삼촌의 볼에 깃털같이 뽀뽀를 하곤 호오 불어주었다.
“헤헤, 우리 삼촌 아프지 마라. 착하다!”
놀라서 눈이 동그래진 삼촌의 머리까지 쓰담쓰담 해준 참이는 속이 시원해져 뒤돌아 내려왔다. 뒤에서 삼촌이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내용은 생각나지 않았다.
참이가 과거의 일을 떠올리고 있는 동안. 정일은 백범의 손을 잡고 자신의 기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백범의 얼굴에 핏기가 돌더니 백범이 눈을 떴다.
백범은 여느 때와 다른 자신의 상태에 의문을 느끼며 정일에게 물었다.
“정일, 벌써 12년이 지난 것이냐?”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아직 1년이 남았습니다.”
“12 간지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기를 새로 채워야 하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네가 어째서 나를 강제로 깨웠느냐?”
한층 엄해진 목소리로 백범이 정일을 다그치자 그의 기세에 눌린 정일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것이……백범님, 제발 저희 딸 좀 살려주세요!”
다짜고짜 백범에게 무릎을 꿇은 정일이 머리를 숙이며 부탁했다. 백범도 참이도 너무 당황해 정일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무슨 짓이냐, 정일! 일어나라!”
“아빠, 왜 그래? 일어나!”
자신의 팔을 잡은 참이의 손을 뿌리친 정일이 비장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머리를 숙이며 백범에게 매달렸다.
“백범님, 시간을 채우지도 않고 백범님을 일어나시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상황이 너무 다급하여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던 백범은 핑그르르 하는 느낌에 기가 막혔다.
“하, 얼마나 급한 일인지 들어나 보자. 어지러운 느낌이라니 도대체 얼마 만에 느껴보는지.”
중얼거리는 백범의 말에 금기를 깬 자신 때문에 백범의 힘이 약해진 것을 알아챈 정일은 더욱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백범님의 기가 상하셨나 봅니다.”
“금기인 줄 알면서도 깨웠을만한 이야기이기를 바란다. 아무리 정 씨 집안의 가주인 자네라도 마냥 봐줄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겠지?”
“네. 백범님 저희 딸을 좀 살려주세요!”
“아까부터 자꾸 딸을 살려 달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앞뒤 없는 정일의 청에 짜증이 솟으려는 걸 백범은 겨우 참았다. 그러다 정일 옆에 멀뚱히 서 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가만히 보니 정일의 어린 딸이었다. 아니 어렸던 딸이었다. 그런데 희한했다.
“정일, 이거 뭐냐?”
“제 딸인 정참입니다. 아마 아홉 살까지는 보셨을 겁니다.”
답답한 정일을 향해 백범이 날카롭게 다시 물었다.
“왜 이 거한테서 인간의 향기와 선녀의 향기가 나냐고! 설마? 자네?”
백범의 질문을 그제야 이해한 정일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막혀하며 백범이 다시 물었다.
“정일, 너 아들 안 낳았냐?”
아빠가 하도 진지하게 부탁하며 매달리는 모습에 나서지도 못하고 듣고만 있던 참이는 아까부터 자신을 가리키며 이거 저거 하는 백범이 마음에 안 들었다.
“이거라뇨? 그리고 아저씨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아들을 찾아요?”
당돌하게 끼어드는 참이의 말에 백범의 눈썹이 십리는 솟아 올랐다.
“뭐? 아저씨? 야, 정일 이거 뭐냐고?”
정일이 대답하기도 전에 다시 참이가 쏙 끼어들어 백범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아저씨, 저 참이에요. 머리 좋게 생겼는데 영 아닌가 보네. 하긴 겉은 저래도 속은 늙다리일 테니.”
“늙다리? 야! 하룻강아지, 그거 지금 나한테 한 말이냐?”
정일의 다리가 흔들거릴 정도로 강한 백범의 포효에도 참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래요, 늙다리! 흥!”
자신의 기가 실린 포효 앞에서 저리 아무렇지도 않다니 보통 인간은 아니었다. 백범은 참이를 다시 찬찬히 살피기 시작하며 정일에게 하나하나 확인했다.
“정일, 이 물건이 다음 대 가주가 된 것이야? 어째서 자네가 아직도 창창한데 이리된 것이지?”
“물건이라뇨? 이 아저씨가 진짜!”
버릇없이 대드는 참이의 입을 막은 정일이 식은땀을 흘려가며 백범의 질문에 답을 했다.
“으이그, 참아 제발!”
“이유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작년부터 제게서 가주의 힘이 사라지고 이 아이에게 보통 인간 이상의 신체 능력들이 보이고 있습니다.”
점점 가라앉는 목소리로 백범이 물었다.
“인간의 향기는 그렇다 치고 선녀의 향기는 뭐야? 이화는?”
눈물을 글썽이며 정일이 대답했다.
“이 아이가 10살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떴습니다. 아마 어린것만 남겨두는 것이 걱정이 되었는지 아이 몸에 자신의 힘을 새겨놓는다고 했습니다.”
선하디 선하고 아름다운 존재였던 선녀 이화를 떠올린 백범은 슬픔을 누르고 조용히 물었다.
“이 아이를 살려 달라는 것은 무슨 말이야?”
정일도 아내와의 추억에 벗어나 다급한 말투로 그간 참이에게 일어난 사고들을 읊었다.
“작년 생일부터 사건 사고가 끊이지가 않습니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목숨을 위협하는 사고들이 생기니 힘이 없어진 제가 지키지도 못하고 미치겠습니다.”
정일의 말을 들은 백범이 참이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한 마디 중얼거렸다.
“딱 하룻강아지만 한 것에게 정 씨 집안 가주라니. 거기에 선녀의 향기까지! 잘한다. 하늘님 당신도 이제 제정신이 아니신 가 봅니다.”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정일의 손을 떼어낸 참이가 다시 백범에게 따졌다.
“듣자 듣자 하니까 이 아저씨가. 지금 나보고 하룻강아지라는 거예요?”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백범이 대답했다.
“그래. 딱 한 입 거리인 하룻강아지가 바로 너다.”
“아으 진짜! 당신이야 말로 뭔데?”
악을 쓰는 참이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정일을 향해 손짓을 한 백범은 의자에 가서 앉았다.
“정일, 시끄러우니 입 다물게 하고 뜨거운 차나 한 잔 가져오너라.”
“네, 백범님! 참아 이리로 와. 제발!”
“아빠, 대체 왜 이렇게 저 아저씨한테 절절매는데? 응?”
따지는 참이를 끌고 지하실을 나온 정일이 일층으로 올라오며 자세한 이야기는 곧 해주겠다고 달랬다.
“참이야, 저분한테 그렇게 버르장머리 없이 굴면 안 돼. 아빠가 어른한테 그렇게 함부로 말하라고 가르쳤어? 오늘 왜 그래?”
화내기 직전인 정일의 말에 참이가 살짝 풀 죽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야 아빠가 무릎까지 꿇고 비는데 그 사람이 야단치는 것 같이 반말로 대답하니까 열받아 그랬지. 거기에 나보고 이거 저거하고 하룻강아지라고도 하고!”
자신을 염려하는 딸의 마음을 잘 아는 정일이 참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랬다.
“저분은 아빠의 조상님들도 받들고 섬겼던 어른이야. 겉모습은 저래도 사천 살이 넘으신 어른이란다. 그러니 예의 있게 굴어야 해. 알았지?”
참이는 백범이 사천 살이 넘었다는 정일의 말을 믿을 수는 없었지만 아빠의 간곡한 부탁에 알았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아빠. 잘할게.”
“우리 참이 예쁘기도 하지. 어서 차를 준비해서 가지고 가자. 백범님은 좋은 수가 있으실 거야.”
걱정거리가 다 사라진 듯이 가벼워진 걸음걸이로 정일이 계단을 오르고, 참이는 답답한 마음에 지하실 쪽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