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정필 Oct 28. 2022

엄마의 속마음

사진출처:네이버 이미지

  2월의 끝자락인데 바람이 매섭다. 지난겨울에도 느껴보지 못한 추위가 우수를 지나 뒤늦게 심술을 부린다. 구순의 노인이 추운 날씨에 보일러는 켜고 계시는지 걱정이 되어 전화를 한다. 한참 신호음이 울리더니 “여보세요”하는 낯익은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 날씨가 너무 추운데 방은 따뜻하나?”라고 묻자 “그래. 날씨가 억수로 춥네. 꼼짝달싹하지 않고 방안에만 있다. 그런데 목욕을 못해서 그런가 온몸이 근질근질하고 찝찝하다.”라며 불편함을 호소한다. 

  결혼 이후 엄마와 나 그리고 어린 딸 3대가 목욕탕 가는 것이 엄마의 ‘낙’이었다. 하지만 2년 전에 시작된 코로나로 목욕탕은 우리들과 멀어졌고, 집안에서 샤워로 일 년을 버티다가(나는 욕조에서 씻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몸의 아우성을 견디다 못해 지난달부터 욕조에 물을 받아 ‘통 목욕’을 시작했다.  목욕을 워낙 좋아하시는 엄마이기에 내일 이후 모시러 가겠다고 말을 하자 “차 기름 값도 올랐고, 바쁜데 올 시간이 있겠나? 그래도 오겠다면 나는 좋지” 내심 기다리고 있겠다는 마음을 담아 전화를 끊으셨다.

  밤사이 ‘갈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마음 힘든 것보다 몸 힘든 것이 나을 것 같아 다음날 아침 친정으로 갔다. 거실에 들어서자 밖과 별반 다르지 않은 찬 기온에 신발을 벗기가 망설여졌다. 친정은 깊은 시골이라 도시와 평균 기온이 3도~5도 차이가 난다. 냉골 바닥에 한 발을 내 디뎌 보다가 신발 벗는 것을 포기하고 현관에서 “엄마 가방만 들고 나와” 말하고는 차로 달려간다. 그렇게 친정에서 추위에 쫓기듯 우리는 집으로 왔다. 

  다음날 늦은 아침밥을 먹고 나는 목욕물을 받았다. 설거지를 끝내고 때를 밀어드리려고 욕실에 들어서니, 뜨거운 수증기에 온 힘을 빼앗겨 축 늘어진 노인이 “야야 혼자 씻었다.”라고 말하며 나가라고 왼손을 젖는다. 그 모습이 너무나 측은해 나는 양손에 때 타월을 끼고 엄마의 등에서부터 때를 밀기 시작했다. “필아 힘들제, 다음에 또 오면 되니깐 조금만 밀어라. 니가 매번 목욕을 데리고 다니니깐, 자식이라도 미안해서 그렇지” 나는 못 들은 척하며 “엄마, 때가 많이 나오네. 그동안 몸이 근질근질 했겠다.”라고 말하니, 그때서야 배시시 웃으며 “그래, 몸이 깨 반하다. 날아갈 것 같다.” 하며 만족해하셨다.

  목욕을 한 후, 곱게 단장하신 엄마를 모시고 시내 아울렛으로 갔다. 우리 집으로 오실 때 입고 계셨던 엄마의 겨울 외투가 퇴색하고 남루해 보여, 이번 겨울이 가기 전에 꼭 따뜻한 외투를 사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울렛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어르신들의 옷이 많은 3층으로 올라갔다. 겨울의 막바지를 보내는 착한 옷들이 줄 세워 걸려있었다. 옷 가게를 두루두루 돌아보던 중, 부드러운 여우털 목도리와 토끼털 안감으로 된 ‘구스 코트’가 걸려있는 매장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엄마의 팔짱을 끼며 매장 안을 들어가려는데 눈치 빠른 엄마는 옷이 좀 비싸 보였는지 “집에 옷이 많은데, 무슨 옷을 또 사노, 그냥 가자”라며 출구 쪽으로 걸어가신다. 그때 매장 주인이 엄마에게 다가가 “어머니 한번 입어만 보세요. 안 사셔도 됩니다.”라며 엄마에게 옷을 입힌다. 뒤에서 할머니를 유심히 바라보던 딸아이가 불쑥 나오더니 “할머니 그 옷 입으니깐 10년은 젊어 보여요. 엄마가 사줄 때 입으세요.” 라며 할머니를 부추긴다. 딸아이 말 때문일까? 엄마는 슬그머니 거울 앞으로 다가가 자신의 모습을 비춰본다.  순간, 엄마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스치더니 금방 굳어진다. “사장요. 이거 비싸지요. 집에 옷이 많은데, 안 살랍니다”라며 옷을 벗는다. 매장 주인과 나는 대충 눈빛을 주고받으며 계산을 했다. 하지만 아울렛에서 집으로 오는 내내 ‘비싼 거 샀다’는 엄마의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그날 밤, 학원을 다녀온 아들 녀석이 차가운 몸을 녹이려 할머니 곁으로 간다. 한참 후, 아들은 할머니 손을 잡으며 “할머니, 엄마가 사주신 옷 입으시고 오래오래 사세요. 제가 커서 할머니 예쁜 옷 많이 사드릴게요”라고 말하자, 할머니는 “할미는 옷보다 고기를 좋아하는데, 많이 사줄래. 그럼 할머니가 오래 살지”하며 손자의 기특한 말에 미소를 짓는다. 뒤에서 그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문득, 새 옷을 싼 엄마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나는 슬그머니 엄마에게 다가가 “엄마 아까 그 옷, 따뜻하기는 하지”라고 말하니 “그래 비싸서 그렇지. 가볍고 따시더라”라는 엄마의 속마음을 들었다. 

  결혼 전에 사드린 겨울 코트를 ‘가람’으로 15년쯤 잘 입으셨는데, 언제부터 인지 세월의 얼룩이 군데군데 묻고, 색깔이 바래져 작년부터 잘 입고 다니지 않으셨다. 오빠가 사준 각진 패팅을 입고 우리 집에 오실 때마다 ‘이번 겨울이 가기 전에 따뜻하고 우아한 외출복 하나 사드려야지’라는 생각은 수도 없이 했건만, 무심한 자식은 겨울이 지나고야 생각이 났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그런데 오늘, 엄마 마음에 쏙 드는 따뜻한 겨울옷을 사드렸다. 몇 해 동안 목안에 서 깐족거리던 가시가 빠져나간 듯 시원했다.  엄마 옷을 사드렸는데 내, 마음이 더 후련하다.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엄마의 속마음. 딸에게 미안해서 목욕을 혼자 하시겠다는 엄마의 마음을, 옷이 고와도 딸의 살림이 걱정되어 손사래를 치는 엄마의 마음을. 잔소리에 감춰진 미안하고도 고마운 마음을. 내가 엄마가 되어 보니 알 것 같다. 내 엄마가 나에게 보여준 그 마음을, 나도 내 딸에게 전하고 있다.  

이전 04화 엄마 이름은 '이순기'입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