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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리 Oct 01. 2021

딱, 다다따닥, 그러다 또 펑!

어쩌다 보니 게임에 구원받았습니다 (1) 지뢰찾기

지뢰찾기를 다시 해봐야 겠다고 생각한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최초로 애착을 가진 컴퓨터 게임. 중고등학교 때, 이십 대 초반 공시족으로 살던 무렵에도, 별 생각없이 가볍게 즐기던 게임. 윈도우즈 운영체제의 기본 프로그램으로 함께 제공되었으나 어느 버전에서부턴가 사라져버린 게임. 기억 속에 까마득히 잠들어 있다가 느닷없이 뇌리에 떠오른 게임. 인터넷을 뒤지면 혹시 녀석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구글 검색 결과에서 진회색 바탕의 16*16 격자무늬를 보자 만감이 교차했다. 깃발과 물음표와 숫자들, 터져버린 폭탄들, 무사히 클리어하면 상단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씩 웃던 노오란 스마일리까지. 초등학교 졸업 앨범을 우연히 꺼내어 단짝이었던 친구의 얼굴을 마주하면 이런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오, 지뢰찾기여, 그런 만남이 있은 후로부터 우린 자주 함께 만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함께 어울렸던 것 뿐인데.

헌데 어렵사리 마이크로소프트 스토어에서 찾아낸 지뢰찾기는 내게 익숙했던 그 지뢰찾기가 아니었다. 요란한 사운드에 컬러풀한 레이아웃. 업그레이드된 그 모습은 어쩐지 서먹함만을 불러일으켜, 결국 몇 판 하지 못하고 게임을 도로 지워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십 년도 지난 지금 초등학교 친구를 다시 만나면 이럴까. 기억 속 모습이 너무 많이 휘발되어 처음 만나는 사람만 못하다는 걸 깨달으면 이리 헛헛할까.

문득 지뢰찾기에 빠져 있던 시절이 떠올라서 나는 몸서리를 쳤다. 사시사철 앵두와 포도와 무화과와 수국 따위가 자라던 시골집, 그곳에서 보낸 스무 해 남짓한 시간들이.


당신은 시골이 얼마나 심심한 곳인지 아는가.


모른다면 시인 이상의 에세이 <권태>를 일독해보길 권한다. 뼛속까지 모던보이였던 이상이 진초록 뿐인 농촌에서 어떻게 괴로워하는지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할 거다. 나도 태생은 서울이라 그랬던지, 시골은 지루하기만 했다. 초등학생 때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로는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대자연의 품에서 뛰놀고픈 맘이 별로 없는데다, 동네에 몇 안 되는 또래들과 그닥 친하지도 않았다. 가끔 외지에서 일하는 아버지가 사랑방에 들어와 지내기도 했지만 포르르 다른 곳으로 떠나버리기 일쑤였으니, 적적함은 일상이었다. 따라서 어떻게든 심심함을 깨트릴 수단을 찾아낼 필요가 있었다.

내가 찾은 수단은 학급 문고에서 빌린 세계 명작이나 친척들이 두고 간 전집류 따위를 읽으며 공상에 잠기기였다. 공상에 공상을 거듭한 덕에 결국 어느 날 할머니가 초코 푸딩, 딸기 푸딩, 바나나 푸딩을 만들어주었다’고 일기를 쓰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어디서 푸딩이라는 단어를 주워듣고 꽂혔던 모양이다. 빨간색 색연필로 선생님이 남겨준 문장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일기에는 거짓말을 쓰지 마세요.’

그러니까 일기 말고 다른 데서 거짓말을 쓰자고 결심이라도 한 걸까.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나는 글짓기를 하고 있었고, 백일장에 꼬박꼬박 참석을 하고 있었다. 다섯 명의 내 중학교 친구들이 등장하는, 제법 긴 무협소설을 완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읽기와 쓰기만으로는 모자랐다. 괴물 같은 호기심은 콩나무로 자라나 구름을 뚫고 별들 사이로 멀어지고 있었다. 적적함을 달래줄 더 강력한 무엇이 있었을까?


있었다.


때는 Y2K를 고작 몇 년 앞둔 1990년대. @hanmail.net 을 개설하고 세이클럽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채팅을 치고 나모 웹에디터로 홈페이지를 만들며 드디어 흡족함이란 걸 느꼈다. 방과 후 곧장 집에 가는 대신 학교 컴퓨터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손바닥만 한 읍내에는 PC방이라는 곳도 생겼다. 컴퓨터실에 자리가 없는 날이면 근처 PC방에서 아는 얼굴들을 여럿 마주쳤다. 그러다 결국 내게도 나만의 컴퓨터가 생겼다. 비록 누렇게 변색된 고물 컴퓨터긴 했지만 그래도 뛸 듯이 기뻤고, 실제로도 펄쩍펄쩍 뛰었던 것 같다.

컴퓨터는 가운뎃방에 놓였다. 가운뎃방은 안방과 작은방 사이에 끼어있는, 사실상 방이라고 부르기에 민망한 공간이었다. 양팔을 옆으로 쫙 뻗으면 닿을 정도의 너비에다 싱글 사이즈 침대를 놓으면 꽉 찰 정도의 넓이를 자랑했다. 하지만 나는 그 방을 좋아했다. 가운뎃방의 원래 용도가 제사라는 점(그래서 제삿날에는 병풍 뒤에 컴퓨터가 숨겨졌다), 봄이면 수백 마리의 날벌레가 기어나온다는 점(차라리 집을 과감하게 불태우고 다시 짓는 게 나았을지도)을 고려하더라도 역시 그랬다. 누우면 천장에서 고조할머니와 증조할머니,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이 나란히 나를 내려다보았지만 그래도 가운뎃방은 처음으로 가진 나만의 보금자리였으니까.

집에는 인터넷 전용 회선이 들어오지 않았다. 다행히 전화선을 끌어다 모뎀을 쓸 수는 있었으나 머리를 좀 굴려야 했다. 요금 폭탄을 맞을 순 없었으니까. 또 여섯 명의 고모들과 큰어머니를 비롯해 이모 할머니, 고모 할머니, 그 밖에 알 수 없는 할머니들이 우리 할머니의 안부를 전화로 묻곤 했으니까.

그러니 powwow로 전화 접속을 한 뒤 익스플로러에서 재빨리 몇 개의 화면을 불러들인 다음 접속을 완전히 끊어야 했다. 당장 링크를 누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오프라인 모드로 열심히 화면을 읽어야 했다. 새로고침을 잘못 누르거나 다른 링크로 이동할 때만 다시 인터넷을 연결했다. 해상도가 높은 이미지나 용량이 큰 음악 파일은 컴퓨터실에서 다운로드해서, 압축 프로그램으로 쪼갠 다음 3.5인치 플로피디스크 여러 장에 나누어 담아왔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러고 살았는가 싶어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러나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내 곁엔, 언제나 지뢰찾기가 있었다.


지뢰찾기는 인터넷 없이도 잘만 돌아갔으니까. 초짜라도 몇 번 상자를 누르다보면 금세 어떻게 게임을 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쉬웠으니까.

혹시라도 언젠가 지뢰찾기에 도전하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몇 자 더 적어보면, 지뢰 찾는 요령은 다음과 같다. 게임을 실행하여 격자무늬 상자들이 보이면 우선 눈 딱 감고 아무 데나 좌클릭으로 찍어라. 내 경험상 첫 상자부터 지뢰가 걸려서 폭발하는 법은 결코 없었다. 하긴, 풋 워크할 여유 정도는 주는 게 최소한의 도리겠지? 그렇게 아무 상자를 열고 나서가 관건이다. 누르자마자 넓은 판이 쫙 열리면 그 다음은 술술 풀린다. 숫자 하나만 딱 나오는 게 문젠데, 이 때는 처음인 것처럼 두 번째의 상자를 랜덤으로 찍어야 한다. 그러다 펑! 하면 그 판은 과감하게 포기하라.

숫자는 주변의 3*3, 즉 정사각형 안의 9개 상자 중 몇 개가 지뢰인지를 알려준다. 가끔 3이나 4, 드물게 5, 6, 7, 8이 나오는 경우에는 손바닥이 축축해질 지도 모른다. 자칫 실수로라도 마우스를 누르는 순간 폭발과 함께 게임이 끝나버릴 테니까.


지뢰찾기의 핵심은 우클릭에 있다.


우클릭만 잘 활용하면 지뢰찾기를 클리어하는 건 결코 어렵지만은 않다. 지뢰가 확실하다고 생각되면 우클릭을 한 번 해서 깃발을 세울 수 있다. 이 상자는 죽어도 열지 않겠다는 표식이다. 아리까리, 긴가민가하면 우클릭을 두 번 해서 물음표로 둘 수 있다. 지뢰인지 아닌지는 나중에 판단하겠으니 지금 당장 열지는 않겠다는 표식이다. 그리고 깃발이나 물음표를 다 세웠다 싶으면, 좌우를 동시 클릭함으로써 나머지 상자를 한꺼번에 열 수 있다.

때로 운에 모든 걸 맡기고 둘 중의 하나의 상자를 반드시 열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도 되리라. 제발, 제발, 되뇌이며 상자를 누르는 순간의 쫄깃함. 다행히 지뢰를 제대로 걸러내서 우르르 네모들이 무너지고 광활한 평지가 드러났을 때의 통쾌함. 그것이 지뢰찾기가 치명적인 이유다.

아, 그러나 어쩌다 지뢰찾기를 떠올린 건 지뢰찾기 자체가 그리워서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대나무숲 특유의 서걱대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등 뒤의 미닫이 유리문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노을을 애써 무시하며, 깃발을 꽂았다 풀었다 마우스를 열심히 달칵거리던 날들. 첫사랑을 앓고, 엽서 가득히 라디오에 보낼 사연을 쓰고, 모기에 물리고, 동구밖을 나서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 샤프를 돌리며 문제집을 풀던 날들. 어제가 그제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은 생활을 되풀이하면서도 언젠가 나를 집어삼킬 거대한 파도를 기다리며 까무룩 잠이 들곤 했던 그 시절이,


진정 그리워서인지도 모르겠다.


추신. 이 글을 쓰고 나서 예전 모습을 많이 간직한, 온라인 지뢰찾기 사이트를 찾아냈다. 비록 우클릭 물음표 기능은 없어서 아쉽긴 하지만 말이다. 심지어 모바일에서도 즐길 수 있다. 상자를 꾸욱 누르면 깃발이 세워진다! https://minesweeper.online/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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