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계획도 계획
불안은 불균형에서 온다.
중심을 잡으면 흔들리지 않고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나는 균형을 잡아야만 한다.
밤이 되면 하루를 마무리하기 아쉬워 잠에 들기 싫으면서도, 다음날 아침이면 눈꺼풀이 무거워 전날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 걸 그랬다는 후회를 하고는 했다.
아침이 오면 오늘밤은 어제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겠다고 야심 차게 다짐하지만, 해가 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두 눈은 맑게 빛난다.
그렇게 잠들기 싫은 밤과 조금이라도 더 자고 싶은 아침이 반복된다.
자발적 백수인 나는 불규칙적인 생활을 규칙적으로 하고 있다.
규칙적인 삶, 정해놓은 틀 안에서 움직이는 것, 선은 지키라고 있는 것, 모든 것은 계획한 후 행동하기.
내 MBTI는 아무리 바뀌어도 J(계획적)는 바뀌지 않을 정도로 계획형 인간이다.
거창한 계획이라기보다는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불확실성을 예측하고 대비하려고 계획을 세우는 편이다.
내 생각 외의 상황이 일어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에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고 최대한 많은 계획을 세워야 안심이 된다.
세상일이 계획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다. 계획을 세울 생각조차 하기 전부터 내 머릿속에선 저절로 계획을 세우고 있다.
가까운 여행을 갈 때에도 이번에는 정말 아무 계획 없이 가겠다고 다짐해 놓고 머지않아 최단거리와 근처 맛집 리뷰를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나는 계획이 틀어지는 것에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정확히는 계획을 실행하지 못한 나를 내가 쉽게 용서하지 않는 편이다.
엄밀히 말하면 계획형보다는 통제형에 가까운데,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겪게 될 때 곤란해지는 상황이 무척이나 괴롭다. 그래서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시뮬레이션을 돌려가며 만약의 만약을 위한 대비를 해놓는다.
가려고 했던 맛집의 웨이팅이 심각하게 길다면? 공지도 없이 갑자기 휴무를 공지한다면? 등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고 그에 대한 플랜비까지 생각한다. 참 피곤하게도 살았다.
남을 통제할 순 없으니 나 자신을 끊임없이 통제해 왔다.
괴로움은 내 마음에서 일어난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 계획하지 않은 상황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다.
상황이 나를 힘들게 만든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나를 힘들게 만들었던 것이다.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오히려 좋다고 생각하면 나 또한 그 상황을 다르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뭐든지 적당한 게 중요하다.
못난 나를 채찍질해 가며 힘껏 달리기만 했더니 결승선에서 기다리고 있던 건 트로피가 아닌 고작 우울증 따위였다. 나의 모든 계획은 무산되었다.
한동안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긴 어떤 회사는 5년 근무하면 한 달 포상휴가도 나온다던데, 나에게도 휴가가 필요한가 보다
라고 받아들이기에는 정말 너무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닌가.
시간은 야속하다. 기어코 코끝이 시린 계절까지 끌고 오고야 말았다.
내가 만들어놓은 틀 안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선까지 지키며 살았는데 우울증이라니
나름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루아침에 살고 싶지 않아 지다니.
무교이지만 가끔씩 신에게 안부도 묻고 기도도 열심히 했던 것 같은데 모든 게 부정당한 느낌이다.
적당히 편히 쉬면서 적당히 열심히 살 걸.
사회생활도, 인간관계도, 나 자신에게도 적당한 관심과 거리가 필요했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미래에 닥칠 순간을 조금이라도 덜 싫어하기 위해 부정적인 시나리오까지 써가며 버텨왔는데, 최악의 결말이 나와버리다니. 이렇게 끝맺을 순 없다.
이대로 결말을 맺지 않고 더 적어보려고 한다.
앞으로는 계획적으로 살지 않을 거라며,
무계획도 계획하는 나는 여전히도 끔찍한 계획형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