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활보 Mar 23. 2023

이 섬에 우리가 있었네

제주에 온 지 꼭 50일이 되었다. 아이가 태어나도 50일 같은 기념일은 챙기니까, 하며 제주살이를 결심했던 때로 돌아가본다. 우리의 제주행은 '인생은 타이밍'과 '용기 한스푼'이라는 식상한 표현으로 족하다. 귤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는 육아휴직이 남아 있고 개복치 씨는 "회사 힘들어 더는 못 해먹겠다" 하던 때. 좀 더 깊숙하게는 한 명은 번아웃, 한 명은 번아웃 직전의 상태였다.


"야, 너두?" "야, 나두!"

"쉴래?" "오예!"


당장의 점심 메뉴는 못 고르면서 인생의 큰 일은 콧방귀 끼며 잘도 결정해버리는 나니까. 우린 결혼 후 오랜만에 의기투합했고 귤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휴직과 제주로의 이사를 감행했다.


왜 제주였냐.

우리는 제주에서 만났다.



제주도는 언제든 갈 수 있겠지 하며 나라 밖만 떠돌다 서른셋에 처음으로 간 제주도. 조용한 게스트하우스만 골라 지내다가 육지로 돌아가기 전날, 삼겹살 파티로 핫하다는 동쪽의 한 게스트하우스를 덜컥 예약했다. 삼겹살 파티는 정말, 이었다. 쇼맨십 가득한 주인장은 삼겹살을 솥뚜껑에 구워주었고 20여 명의 게스트들이 왁자지껄 한자리에 모여 술과 삼겹살을 먹어치웠다. 2차 술자리를 세팅하는 동안 설거지할 사람을 정하기 위해 가위바위보를 했다. 기름기 가득한 설거지가 산더미. 여자 1명, 남자 1명. 내가 그 불운한 여자였고 개복치 씨가 그 불운한 남자였다.


배낭여행러 시절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친구들과 다음 일정을 함께하는 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어서 이튿날 개복치 씨와 그의 후배의 차를 기꺼이 얻어 타고 몇 시간 함께 제주관광을 했다. 재밌는 친구들을 사귀었네, 정도의 감상과 함께 일상으로 돌아왔는데.


배낭여행을 하면서 많은 친구들을 사귀지만 그만큼 또 연락이 끊기기 마련이어서 개복치 씨와도 그럴 줄 알았다. 어라, 국내여서 그런가 뜨문뜨문 연락이 이어지더니 이하 많은 스토리 생략. 가위바위보로 서로의 불운을 확인했던 우리는 불운을 행운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 자신하며 1년 3개월 후 결혼이란 걸 했다. 



제주도 가져갈 짐을 싸면서 버린 줄로만 알았던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의 머그잔을 부엌 상부장 손 닿지 않는 칸에서 발견했다. 그리고 완전히 잊은 줄 알았던 추억도 툭 튀어나왔다. 첫 제주여행에서 동일주버스를 타고 또 다른 시골버스를 갈아타고 찾아갔던 곳. 버스에 승객이라곤 나 혼자여서였을까 기사님은 정류장도 아닌 두모악 정문에 내려주며 안전한 여행을 빌어주었는데. 나는 한 폭의 사진 앞에 오래 서 있다가 머그잔을 사서 돌아나왔다.

제주도에서 돌아와 읽은 그의 책이 <그 섬에 내가 있었네>다. 10년이 지난 지금에야 그 책의 문장들에 좀 더 가까워진 기분이다.


"온종일 누워만 지내기에는 하루가 너무 길다. 사진을 찍을 수 없는 하루는 너무 더디 간다. 침대에 누워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기적을 소망하는 것뿐이다. 지금까지 걸어온 세월을 들추며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 나의 일이다."


"나에게 내일이란 기약할 수 없는 시간이다. 허락된 것은 오늘 하루, 그 하루를 평화롭게 보낼 수 있으면 된다. ... 하나에 몰입해 있는 동안은 오늘도 어제처럼 편안하다. 하루가 편안하도록 오늘도 하나에 몰입한다."


가져온 머그잔으로 매일 개복치 씨와 커피를 마신다. "우리가 만난 이 섬에 와서 살다니" 하면서. 마음 속으로는 '와, 이혼 안 하고 여기까지 왔네. 대견하다 나 자신'. 올레길을 혼자 걷던 그때의 나로부터 십억광년쯤 멀어진 느낌이지만 귤이와 함께 그의 사진을 보러 갈 생각을 하니 좋기도 하구나 싶으면서.

이전 09화 먹이 주는 너의 보드라운 마음을 사랑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