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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활보 Oct 22. 2023

먹이 주는 너의 보드라운 마음을 사랑해

내 유년의 배경은 풀벌레 울고 산에서 노루도 뛰쳐 내려오는 시골이었지만 귤이는 신도시 아파트에서 나고 자랐다. 제주에 오기 전 귤이를 둘러싼 자연이라 하면 어린이집 주변의 텃밭과 산, 가끔 가는 우리 엄마아빠의 시골집뿐인데도 귤이는 온갖 살아 있는 것들에 정 붙이는 어린이로 자라났다. 추운 겨울날 길고양이에게 간식 하나를 먹이기 위해 어느 캣맘이 마련해 둔 고양이집까지 찾아가 고양이가 나타날 때까지 손을 호호 불며 기다리던 아이. 친구들의 요청에 방아깨비나 메뚜기를 맨손으로 척척 잡지만 다리 하나 안 떨어지게 조심스런 손길로 관찰하고는 풀숲으로 돌려보내는 아이.


제주에 올 수 있었던 것도 귤이의 이런 성향이 한몫했다. 흙 묻은 신발을 더러워하며 매번 운동화를 빨아달라고 하면서도 맨손으로 굼벵이, 뱀 허물, 지렁이는 잘 만진다. 떨어진 열매나 나뭇잎, 돌멩이, 조개껍데기 줍기를 좋아한다. "아~ 귀여워!" 귤이가 늘 하는 말. 거미는 물론이요 개구리, 뱀, 우리 집에 날아들어온 날파리까지 귤이는 귀여워한다.


숲체험을 하다가 발견한 달팽이도, 텃밭의 애벌레도 귤이는 데려와 보살피고 싶어 안달이다. 길고양이를 보면 배가 고플까 걱정한다. 아주 가끔이지만 내 다리에 오일을 발라주고 물을 마시게 하고 베개를 갖다 주고 이불을 덮어줄 때도 있다. 그리곤 묻는다. "엄마, 귤이가 이렇게 돌봐줘서 참 좋지?" 귤이의 돌보려는 마음은 어디에서 온 걸까? 무척 귀찮아하면서도 뭐든 잘 기르는 우리 아빠에게서? 누구든 잘 보듬는 우리 엄마에게서? 가끔 그 유전자의 기원을 찾고 싶어진다. 그러다 문득, 모든 여린 것을 사랑하는 어릴 적 마음은 왜 커갈수록 메말라버리는지도 궁금해진다.


네, 뱀 허물 맞습니다. 넘나 소중

제주에 온 뒤 귤이가 가장 많이 간 곳은 '말방목공원'과 '제주자연생태공원'이다. 귤이는 나중에 투표를 하게 되면 눈 밝은 유권자가 될 것 같다. 선심쓰기용, 표심잡기용 정책을 내놓는 후보는 땡이다. 동물들에게 먹이 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먹이를 한 번 주는 건 형식적이라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 배고픈 동물들에게 그런 이벤트성 혜택은 가당치 않다는 듯 몇 번이고 먹이를 줘야 직성이 풀린다. 아침미소목장에서 크게 지갑을 털린 뒤 가정경제 파수꾼의 심정으로 위의 두 곳을 찾아냈다.


집에서 20분 거리의 말방목공원에는 무인으로 운영되는 사료 판매대가 있고 가격은 단돈 1000원. 말들과 염소들, 포니 두 마리, 토끼들이 지낸다. 매번 3천 원으로 말과 포니와 염소들을 먹이고, 저희들이 먹다 떨어뜨린 건초를 알뜰살뜰 긁어서 모아준다. 사료를 채우러 오신 주인분과 안면을 트기도 했는데 알고 보니 아이가 귤이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동네 분이었다. 조심스레 허락을 받은 뒤 집에서 당근을 가져다줄 수 있었다. 무려 한 봉지에 4천원인 구좌산 세척당근을! 귤이는 하나로마트에 갈 때마다 당근을 사고, 돌이 많이 섞여 뿌리채소는 안 된다는 어르신들의 만류에도 텃밭에 당근 씨를 뿌렸다. 염소가 새끼를 낳고 그 새끼가 커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울타리의 어느 부분에서 먹이를 줘야 포니와 염소가 받아먹기 편한지 귤이는 다 안다.


말방목공원에서 성산 방향으로 조금 달리다 보면 외딴곳에 제주자연생태공원이 있다. 이곳은 야생에서 다친 동물이 치료도 받고,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혹은 돌아가지 못하는 동물들이 지내는 곳이다. 노루와 토끼 먹이주기 체험을 할 수 있고 자연물로 만들기를 하는 공간도 있다. 다리 잃은 노루가 따뜻하게 보살핌을 받고 노루들이 공원 곳곳을 노니며 먹이를 먹거나 햇볕을 쬔다. 입구에서 먹이를 받아 들고 토끼와 노루들에게 먹이를 준 뒤 만들기 체험을 하고, 온실에 들러 장수풍뎅이 굼벵이를 만져보고 온갖 곤충을 살피는 것이 귤이의 코스다. 이 모든 체험 비용이 무료! 야생동물들과 어떻게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지 백 마디 말보다 더 잘 알려주는 소중한 곳이 아닐 수 없다.


제주에는 동물원이 없지만 여러 동물들을 모아놓고 먹이체험, 쇼 등을 운영하는 사설 동물원들이 있다. 학대 등의 문제로 귤이는 한 번도 데려가지 않았다. 말방목공원도 제주자연생태공원도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곳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돌보는 곳이라 안심이 된다.


오랜만에 가족들이 육지에서 놀러 와 북적이던 날, 부엌에서 뭔가를 하던 내게 귤이가 다가와 조금은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잠깐 나랑 둘이 이야기할 수 있어?"

손을 잡아끌고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꼭 닫더니 하는 말.

"엄마 나 빨리 죽기 싫어. 오늘 선생님이 그랬는데 지구의 생명이 얼마 안 남았대. 어떡해."

그야말로 눈물 광광, 잘 달래 지지 않는 큰 슬픔의 눈물이었다. 걱정봇으로서, 장래 희망 에코페미니스트로서 그 문제를 자주 염려하는 나이지만 귤이의 걱정을 덜어주고 싶어 최대한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응. 지구가 아파하곤 있지만 귤이보다는 지구의 생명이 더 길거야. 걱정 마~ 그리고 우리가 노력하면 지구의 생명을 다시 길~게 해줄 수 있어."

내가 예로 든 건 코로나 락다운 때 되살아났던 자연이었다.

"그렇지만 코로나는 지구한테만 좋지, 사람한테 안 좋은데 어딱해."

"그러니까 코로나가 다시 많아져야 하는 건 아니고 우리가 다른 방법으로 지구의 생명을 길게 하면 되지 않을까? 가까운 데는 걸어 다니고. 또 뭐가 있지“

"전기를 아껴 쓰고? 물도 아껴 쓰고?"

"응 꼭 필요하지 않은데 물건을 사서 잠깐 쓰고 버리는 것도 하지 말고"(다이소 좀 그만 가라고 귤이야)

"맞아."

"정말 많은 방법이 있네. 뭐부터 해볼까?"

"엄마, 우선 이거를 사람들한테 알려줘야겠어. 안내문을 만들어서 붙이자."


그날 귤이는 자체 포스터를 제작했다. 종이에 똑같은 걸 여러 장 그리려 하길래 그림 그리기 앱으로 그리게 했더니 며칠을 걸려 완성한 뒤 프린트를 해달라고 했다. 이제 귤이의 고민은 그 종이를 어디에 붙일까, 혹은 누구에게 나누어줄까다.


나비 한 마리부터 우리가 사는 지구까지. 돌보는 마음, 살리려는 마음, 여린 존재들을 보듬으려는 마음이 귤이에게 있다. 그런 마음을 나약하다 하지 않고 키워주는, 다정한 태도의 밑천이 되는 곳이 제주가 아닐까. 제주에 오기 전 누군가 물었다. "귤이가 나중에 커서 제주도에서 지낸 거 기억이나 할까?" 아주 어린 아들 중빈을 데리고 터키, 아프리카, 동남아 등지를 여행한 오소희 작가는 비슷한 물음에 "중요한 것은 기억이 아니라 태도"라고 답한 바 있다. 귤이 역시 나중에 커서 먹이 주기 체험 따위 잊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경험이 켜켜이 쌓여 어떤 보드라운 마음,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귀하게 여기는 어떤 태도를 갖게 되지 않을까 하고, 그걸 지켜봐 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이 아닐까 하고, 귤이가 얻어온 반려 굼벵이의 발효톱밥을 갈아주며 생각해 본다.


지구에 시간이 별로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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