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이 알려주는 호흡법
개복치 씨는 금요일마다 승마를 배우러 간다. 만약 육지의 우리 집이었다면 집에서 커피나 내려 마시며 혼자 느긋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10월의 제주 날씨엔 무조건 나가야 한다. 진짜다. 하늘빛, 바람결, 햇살톤이 완전한 합을 이루는 가을은 손뼉 한 번 치면 끝나고 머잖아 겨울의 긴 장막이 드리워지니 여러분 신발끈 당장 묶어!
집에서 승마장으로 가는 길에는 산책할 만한 곳이 많다. 테크노마트(언제 적이냐)에서 호객하는 상인들처럼 숲이 가지를 힘껏 뻗어 꼬셔댄다. 순서대로 교래곶자왈, 삼다수숲길, 붉은오름자연휴양림, 사려니숲길, 물영아리오름이 나온다. <나는 솔로>의 옥순처럼 후보들 중 누굴 고를지 짐짓 고민해 보지만 선택은 늘 같다.
“남편, 사려니숲에 내려줘.”
제주도민의 산책이라 하면 관광객 드문 한적한 곳을 찾을 것 같지만 아이러니하게 사려니는 위의 숲들 중에서도 가장 붐비는 곳이다. 입장료가 무료에 주차장도 넉넉하고, 입구 쪽에는 노약자, 장애인 등 모두가 걷기 좋은 ‘무장애길’이 완비되어 있다.
사람들이 관광버스에서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와 북적대는 무장애길을 당당하게 지나쳐 숲의 심장으로 진격해 들어간다. 숲 안쪽까지 들어오는 사람이 적어 고즈넉한 반면 밖이 붐비는 것을 알고 있으니 어쩐지 안심이 된다. 그렇다고 혼자는 아니다. 반드시 누군가 앞에서 걸어올 거라는 확신을 주는 숲이다. 사려니숲은 입구가 두 개여서 반대쪽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이 드물지만 꼭 있다, 내가 인생에 건 기대처럼. 혼자일 때도 있지만 완전히 혼자인 순간은 없을 거라는 안도, 사려니숲이 그렇다.
입에 사려니라는 단어를 품으면 어쩐지 둥글어지는 기분이 드는데 사려니는 제주말로 “신성한 숲” 또는 ”실 따위를 흩어지지 않게 동그랗게 포개어 감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름 따라 사는 건 사람만이 아닌 듯 호위무사처럼 양쪽에 숲을 두고 걷노라면 고요 속의 환대를, 깊숙한 곳을 감싸 안아 어루만져주는 초록의 기운을, 자궁 안에서만큼의 안온함을 껴안게 된다.
박사논문 <반사경>을 세상에 내놓고 학계에서 축출당하고 교수직을 뺏겼던, 동료들에게조차 철저히 외면받았던 루스 이리가레는 <식물의 사유>를 통해 어떻게 식물로부터 ‘숨’을, 그리하여 ‘생명’을 되찾았는지를 보여준다. 학교에서 배웠던 “식물은 우리가 뱉은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이고 산소를 만들어줍니다”라는 단순한 과학적 사실을 뛰어넘는 존재 간의, 세계 간의 교류가 있다. 우리와 식물 사이에는.
"식물 세계 덕분에 나는 다시 살게 되었고 사유도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공기가 있다'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나는 또 다른 '있음'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호흡 이외의 다른 것이 없어도 새로운 시작과 새로운 세계는 가능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조금씩 내 안에 자유로운 호흡의 여분으로 만들어진 빈 터를 열어갔고 그곳에서 나는 지각할 수 있었으며, 내가 지각한 것에 형상을 부여할 수 있었습니다. (...) 비록 우리가 공기에게 같은 역할을 하지 않을지라도 공기는 우리를 살아 있는 관계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공기를 통해서 나는 우리의 전통이 단절시킨 보편적 교환에 참여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보편적 공유에 참여했습니다." <식물의 사유>, 42-43쪽
의식하지 않아도 숲에서의 호흡은 절로 깊어진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헥헥대지 않았을 뿐 그동안 얼마나 얕은 숨을, 겨우겨우 쉬고 살아왔는지.
숲의 공기가 품고 있는 내음, 완벽에 가깝다고 느껴지는 습도, 살짝 무겁게 느껴지는 밀도까지, 생명 그 자체인 것 같은 공기가 콧속을 청소하며 폐로 밀려들어온다. 온몸이 부풀어 오르게 들숨, 풍선 빠지는 소리를 내며 아주 천천히 날숨. 숨을 쉬다 고개를 들어 올리면 우거진 나무 탓에 하늘은 파란 오솔길처럼 가늘게 이어지고, 다시 눈을 내려 주위를 보면 온통 초록. 초록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초보 선원처럼 나는 천천히, 하지만 무릎에 힘을 싣고 앞으로 나아간다.
호흡에 집중하며 오감으로 숲을 음미하는 동안 안으로는 고요함이 넘쳐흐른다. 그러다 한순간 살아 있음의 감각이 온몸에 채워져 몸을 설핏 떨기도 한다. 그럴 때면 하고 싶은 것들이 생겨나 어깨를 톡톡 두드린다. “살아 있으니 좋지?” 하며.
쫓기듯 제주에 올 때 사람들이 물었다. 제주서 뭘 할 거냐고. 무계획이기도 했으나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 몰라 대답이 망설여졌다. 그렇게 제주 올 때는 없었던 제주 버킷리스트가 제주 생활이 끝나가는 즈음에야 숲을 걸으면서 생겨났다. 마치 인생의 버킷리스트처럼. 20대 버킷리스트라고 적어놓은 것들은 투두리스트(to do list)에 가까웠는데, 주어진 날들이 적어진 지금에야 버킷리스트다운 목록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많은 블로그에서 사려니숲을 소개할 때 빠뜨리지 않는 경고가 있다. 사려니숲엔 입구가 두 개인데 내비게이션에 ‘사려니숲 주차장’이라고 치면 숲길 입구까지 한 시간은 걸리니 그리로 가지 말고 꼭 주차장 가까운 붉은오름 쪽 사려니입구로 오라고. 그런데 여러분 제가 그쪽도 세 번 가봤는데 거기 입구도 끝내줍니다. 주차장에서 입구까지 가는 길은 한라산 둘레길에 속한 만큼 오르막이 좀 있긴 하지만 비자림로의 삼나무숲 풍경이 압도적이에요. 실수로 비자림로 입구로 갔다고 좌절하지 마시길. 왠지 후회되고 잘못 온 것 같아도 그 선택에서만 맛볼 수 있는 단맛은 꼭 있더라니까요. 물론 숲이 알려주는 호흡법은 그쪽 입구에도 있고요. 아, 물론 걸음이 좀 불편하거나 더 고요히 걷고 싶은 분은 제가 금요일마다 걷는 붉은오름 쪽 입구를 택하시길요. 그럼 씁씁후후, 숲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