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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활보 Sep 16. 2021

스무살, 속초병원 응급실

술과 함께 넘은 여러 고개와 고비가 있다. 주량이 얼마인지 알지 못하는 시기를 거쳐 자리 잡은 주량을 시험하는 시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해 늘어난 주량을 보며 한껏 취하는 때, 하락세, 끝모를 하락으로 술에 심드렁해지는 시기, 의욕을 충전해보지만 번번이 술에 일상을 저당잡혀 슬그머니 술잔을 내려놓는 때, 좋은 음식 곁에 두고 살짝 위장을 적셔보는 시기, 저 모든 때를 지나 수줍은 반주의 시기로 넘어왔다.


제목에 스포했듯 스무살 꽃다운 나이, 술 때문에 속초병원 응급실에 실려갔다. 바로 첫 번째 단계, 주량이 얼마인지 알지 못하는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때는 2000년. 적어보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목덜미부터 간지러워지는 스무살 여름, 동아리 세미나를 떠났다. 설악산 종주를 하려던 우리는 비 때문에 야간에 다급히 하산했다. 그리곤 바닷가 민박 예약일정에 맞추기 위해 비선대 산장에서 이틀을 묵고 동해(동해시 말고 우리의 독도가 자리한 East Sea) 어느 바닷가 마을로 넘어갔다.


거기서 본격적인 '세미나'가 시작됐다. 신입생의 장기자랑(동기들아 기억하니? <바위처럼>에 맞춰 군무를 췄던 그때의 우리들을...)도 있었고 어딘가 어설퍼 그게 그거 같지도 않았던 군기잡기, 다음 학기 동아리 발전 방향에 대한 토론도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빠지지 않은 것이 우리를 망치러 온 구원자, 술이었다.  문제는 우리가(내가) 우리의(나의) 젊음을 과신했다는 것, 비선대 산장에서 머무는 동안 마셨던 그곳의 모든 머루주가 디톡스된 몸의 혈관을  타고 여전히 돌고 있었으며 간도 열일 중이었다는 것. 거기에 소주와 맥주가 더해지자 스무살의 간이 넉다운되고 말았다. 내 흥인지 젊음인지에 내가 취해, 그 다음엔 술이 술을 먹어, 술병이 나고 말았다. 놀랍게도 그렇게 될 줄 정말 몰랐다. 주량을 몰랐으니까.


술병, 이 얼마나 깔끔한 단어인가. 술병이 감춘 것은 뉘엿거림에 이은 구토, 구토에 따른 기력저하와 두통, 너무 빨리 뛰어 이러다 큰일나지 싶은 심장, 발열감, 그리고 더러움과 피곤함, 눈물이나 했던 말 또하기 따위다. 그따위걸 하면서 고통에 몸부림친 나를 보다 못해 선배들은 택시를 불러 속초병원 응급실로 데려갔다. 의학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응급실을 (다행스럽게도) 스무살에 처음 갔지만, (불행히도) 술병으로 가다니. 어쩐지 최초가 더렵혀진 기분에 우울했다(그럼 뭘로 응급실을 가야겠냐...).


응급실에서 링겔을 맞고 정신이 들었지만 덜 든 척 연기하며 숙소로 기어들어간 나는 선배가 설악산 약국에서 사다준 약을 먹으며 잠을 청했다. 그 와중에 "야, 속초병원 응급실, 설악산 약국, 뭐가 딱딱 맞지 않냐" 헛소리하다가 동기에게 등짝을 맞아가면서.

 


이토록 힘이 센 능력주의 시대에 살다보니 그때 주량 말고 다른 걸 키우면 더 좋았겠다 싶지만, 뭐 주량이라도 어때. 그때의 나는 "얼마나 마실 수 있을까? 이게 내 한계인가? 이 정도 마시면 안 토할까? 막걸리보다 소주가 더 센가?" 따위의 궁금함을 안고 술잔을 기울였다. 나를 키운 건 칠할이 술이었다. 모판에 뿌려진 볍씨처럼 이어진 숱한 술자리에서 나는 볍씨에서 모로, 벼로, 무럭무럭 자랐다. 선배들이 시켜준 술안주가 자취생의 배를 불려주었고 취향이나 관계, 다양한 삶, 태도들, 꿀팁과 반면교사,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많은 일들이 한 평 술자리에서 벌어졌다.


그때 알지 못한 건 주량뿐만이 아니었다. 나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다.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더욱 끌리는 건 뭔지, 이유없이 꺼리는 것, 냉담한 것, 안달복달하는 것이 대체 뭔지, 어느 것을 어느 카테고리에 넣어야 하는지, 내 감정이 뭔지, 뭐가 먹고 싶은지까지, 아무 것도. 그건 어쩌면 몰랐던 게 아니라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국으로 학교-집만 오간 10대를 보냈으니까. 취향이든 가치관이든 나를 향한 관심이든, 그걸 만드는 데 필요한 게 뭔지조차 몰랐으니까. 데이터가 없으니 분석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많은 것을 알고 나니, 생겨버리고 나니, 주량도 모르고 취향도 쥐뿔 없었던 시절로 돌아가 어느 것도 될 수 있고 그 무엇도 되지 않아도 괜찮은 가능성에 몸과 마음을 비벼보고 싶다. 경험하는 모든 것이 진정 새롭고 재밌어서 눈이 빛나고 몸이 기울고 마음이 막 터져버릴 것 같던 때, 짜릿함이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내려꽂히던 걸 또 느끼면 좋겠다. 정말 그뿐이다. 그때의 생간을 원하는 게 결코 아닙니다.


#술 #Day15 #야.나.써 #딱: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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