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후 저녁. 준호와 수현은 카페를 정리하고 있었다.
퇴근한 이나가 카페로 들어섰다.
"삼촌은?"
"응. 좀아까 먼저 퇴근했어."
카페에서는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꽃과 책,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감성적인 분위기를 더해준다. 부부가 함께 운영하고 있는 이 카페는 저녁 6시까지만 영업을 한다. 준호의 아버지가 물려준 이 건물에서.
1층에는 그들이 운영하는 카페가,
2층에는 도혁이 운영하는 킥복싱 학원이,
3층에는 PUB이 있다.
이나는 그들이 말없이 눈으로 대화하며 척척 정리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부부는 일심동체. 이 말이 제일 잘 어울리는 부부가 아닐까 싶다. 그들은 일도 함께, 집에서 요리와 집안일도 함께, 운동도 함께 한다. 그렇게 붙어 있다 보면 싸울 법도 한데. 결코 싸우는 모습을 보이는 일이 없었다. 남과 싸우는 일은 있어도. 만약 싸우더라도 단둘이 밖으로 나가 차분하게 대화로 해결을 본다.
나도 저런 결혼생활을 할 수 있을까?
이나는 종종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결혼을 한다면 저들처럼 서로를 먼저 배려하고 존중하며 유쾌하게 지내고 싶다고. 부부라면 굳은 믿음으로 맺어져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세상의 많은 부부가 그러지 못해 큰 싸움으로 번진다. 바라고 기대하는 바가 커서 그럴까. 사랑이 식어서일까. 왜 서로를 속이고 물어뜯으며 전쟁을 하는 걸까. 부부는 싸워서 이겨야 하는 관계가 아닌데 말이다.
배려와 신뢰와 존중이란 참 어려운 일이다.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어떻게 찾아왔을까?
문이 열리며 연장을 든 열댓 명의 남자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준호는 단번에 알아봤다. 지난번에 치킨집을 박살 낸 놈들을.
그날의 영상을 찍은 누군가가 유튜브에 올렸고, 그 영상은 아주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그러면서 준호와 수현이 운영하는 카페가 어디인지도 자연스럽게 알려졌다. 그 덕에 놈들은 쉽게 부부를 찾을 수 있었다.
한 명씩 상대해선 안 된다는 걸 지난번에 체득한 놈들은 떼로 덤벼들었다. 이 정도에 겁을 먹을 이나네가 아니다. 그들은 다양한 기술을 화려하게 써 가며 놈들을 하나씩 쓰러뜨렸다. 셋이서 각각 다섯 명을 상대하는 데도 전혀 밀리지가 않았다. 오히려 상대 쪽만 크게 타격을 입을 뿐. 놈들은 손에 들린 연장과 덩치가 무색할 정도로 맥없이 쓰러졌다. 수현에게 너무나도 가볍게 들려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놈이 자존심이 많이 뭉개졌나 보다. 씩씩대며 재킷 안에서 칼을 빼들었다. 그녀의 뒤로 슬금슬금 기어가더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수현이 다른 놈을 또다시 들어 올려 바닥으로 내던지던 그 찰나에 기습을 했다.
얼른 몸을 돌려 피했으나 칼에 제법 스친 뒤였다.
그녀의 종아리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여보!!!"
준호가 아내에게 달려갔다.
"당신 괜찮아?"
"괜찮아. 잠깐 스친 것뿐이야. 이제 나이가 들었나. 잠시 방심했네."
그 사이 남은 놈들은 이나가 모두 처리했다.
열다섯 명이 바닥에서 뒹굴고 있었다. 카페 안이 그들의 신음소리로 가득 차오르던 그때. 행인들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들이 카페로 진입했다.
"괜찮으십니까?"
이나는 젊은 경찰을 보고 반가운 마음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어느새 그녀의 볼은 복숭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한데 그를 보던 수현의 눈빛이 이상했다. 모호하게 반짝이는 느낌이랄까. 구급대원들의 부축을 받아 구급차로 이동하면서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이내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저 혹시 성함이..?"
"이재희입니다."
그의 이름을 들은 그녀의 동공은 더 크게 반짝였다. 마치 잃어버린 반지를 다시 찾은 사람처럼. 수현의 뒤를 따라가던 이나는 엄마와 재희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이유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재희와 만나자마자 헤어져야 하는 상황에 안타까운 마음이 더 컸다.
수현은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엄마! 엄마!"
응급실을 떠들썩하게 만들며 이한이 들어왔다. 도혁과 함께. 수현이 다쳐 병원 신세를 지는 일은 살면서 이번이 처음이라 많이 놀란 듯하다.
"으아아앙."
눈물을 한가득 쏟으며 수현에게 안겼다.
"엄마 괜찮아."
"괜찮긴. 20 바늘이나 꿰맸는데."
이나의 말에 이한은 더 크게 울어댔다. 어린아이처럼.
스물넷이지만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면모가 그득한 이한이다. 특히 엄마 앞에서는 더더욱. 평소에도 매일 엄마에게 안기며 애교를 부린다.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는데도 여전히 사랑을 갈구하는 그를, 모두 사랑스러워했다.
"아 왜 저래. 창피하게."
이나만 빼고.
"그 자식들 내가 절대 가만 안 둘 거야!"
이한이 분노의 눈물을 뿜어내며 씩씩거렸다.
도혁은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누나가 출산을 제외하고는 병원을 찾은 게 이번이 처음이라 낯선 기분이 드는 건 마찬가지였다.
상황을 수습한 준호가 뒤늦게 응급실에 왔다.
수현을 제외하고 네 사람의 눈빛이 어딘가 기묘하다.
마치 먹이를 발견한 맹수의 눈처럼.
어쩌면 지금 그들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 잘못 건드렸어.'
그들과 다르게 수현은 혼자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까 본 젊은 경찰, 이재희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동안 이나네 가족이 구해준 아이가 합쳐서 수백, 아니 수천 명은 될 것이다. 금전적인 도움까지 포함한다면. 그런데 그 아이는 어째서 기억을 할까? 사랑 고백을 받았던 날 목숨을 걸고 구해준 아이라서?
사실, 매년 재희의 엄마가 그들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내왔었다. 재희의 사진 한 장과 함께. 덕분에 재희가 잘 성장하고 있다면서. 편지는 재희의 중학교 졸업 사진 이후로 오지 않았다. 그저 잘 살고 있겠거니 생각하고 말았지만, 가끔 소식이 궁금하긴 했다.
부부가 카페를 운영하는 건 취미처럼 하고 있는 일이다.
그들에게는 막대한 재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준호의 아버지 수철이 남긴 돈이다. 하지만 그 돈은 허투루 쓸 수 없기에 생활비는 직접 벌어야 했다.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데 써 주길 바란다."
이 돈은 다른 사람에게 받은 돈이다.
준호가 10살 때였으니까 40년 전. 재벌집 자녀가 납치됐었다. 우연히 멀리서 그 상황을 목격한 수철이 그 뒤를 끝까지 집요하게 쫓아갔고 아이를 무사히 구할 수 있었다. 너무나도 거액의 돈이라 극구 거절했는데도 회장님이 직접 찾아와 감사의 의미로 꼭 받아줬으면 좋겠다며 정중하게 부탁하기까지 했다. 더 이상 거절하기가 어려워 그 돈을 받았다. 대신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잘 사용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 돈은 더 불어나 더 거대한 액수가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가족회의를 거쳐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에게 익명의 이름으로 돈을 선물하고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떼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줬던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 속 '행복한 왕자'처럼. 이나는 어둠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될 때마다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 숫자가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거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라도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도와줄 수는 없지 않은가.
살면서 아무런 도움도 필요 없는 인생은 없다. 그러나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지금도 어디선가 도와달라는 외침이 땅속에 묻히고 있을지도 모른다. 형편에 따라서 혹은 안전의 문제로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미미한 도움이라도 줄 수 있지 않을까? 미미한 도움이 모여서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이나는 기도했다. 더 많은 이들이 마음의 불빛을 켜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