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씨. 왜 이렇게 캄캄한 거야."
엄마의 복수를 하겠다며 호기롭게 나선 이한은, 얼마 전에 유튜브로 본 '전설의 고향' 같은 분위기에 당장이라도 도망칠 기세였다. 고등학교 때 혼자서 15명을 상대했을 때도 이렇게 식은땀이 나진 않았는데.
주변이 논밭으로 그득하고, 조명은 듬성듬성 켜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운 밤. 외곽의 어느 시골에서 홀로 서 있으니 괜히 무언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서울은 밤에도 휘황찬란하다. 그래서 아무리 늦은 밤에 혼자서 운동을 해도 아무렇지가 않았다. 이상하다. 시골의 밤은 왜 이리도 무서운 것인가. 전설의 고향 때문이라고, 이한은 생각했다. 용기를 내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다 보니 저 앞에서 거대한 창고 같은 이미지의 건물이 보였다. 어스름한 불빛을 뿜어내고 있는.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찾았다."
잔뜩 상기되어 있던 얼굴에 이제 조금 혈색이 돌았다. 저곳은 사채업자들의 아지트 같은 곳이다. 생각보다 조직의 규모가 컸다. 복수를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수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얼마 전에 해커인 친구에게 부탁해서 얻어낸 정보다. 대체 어떤 수작을 부리고 있는지 직접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모두가 잠든 밤에 혼자서 잠입을 했다.
몸을 숙여 슬금슬금 건물의 뒤쪽으로 이동했다.
천장이 아주 높은 건물이었다. 창문도 상당히 높은 곳에 달려 있었다. 키가 186cm인 이한이 까치발을 해도 닿지 않는 위치였다. 이한은 주변에 있던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그 위로 올라갔다.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는데 어둡고 희미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구석에 한 여자가 쓰러져 있었다. 옷은 찢겨 있고 얼굴에는 멍이 가득해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수준이다. 죽었을까. 숨죽이고 지켜보는데, 다행히 몸을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할 거라고 이한은 짐작했다.
"저기요. 괜찮아요?"
이한은 창문을 살짝 열어 여자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속삭이듯이.
"..."
여자는 대답이 없었다. 이한은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몇 번 더 불러봤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상했다. 만약 목소리가 들렸다면 어떠한 반응이라도 하는 게 정상 아닌가. 이 상황에서라면.
잠시 동안 그녀를 뚫어져라 관찰하던 이한은 경악했다. 여자의 귀가 터져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지금은 잘 들리지 않는 게 분명해 보였다.
그때. 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여자의 발을 잡아들고 질질 끌고 갔다. 여자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치고 지쳤지만 몸속 깊은 어딘가에서부터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그런 소리였다.
'당장 뭐라도 해야 해.'
휴대폰으로 경찰차 사이렌 소리를 크게 틀었다. 남자가 멈춰 섰다. 동료로 보이는 남자가 급하게 뛰어와 물었다.
"경찰인가?"
"아니. 저길 봐."
일단 여자부터 구해야겠다는 마음에 너무 급했던 걸까.
허술하게도, 이한의 휴대폰 불빛이 살짝 비치고 있었던 것이다. 발각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일단 후퇴.
벽돌에서 내려와 한참을 도망가던 이한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지금 이대로 가 버리면. 저기 잡혀 있는 사람들은 어떡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혼자서 무작정 상대하기엔 무리다. 저 안에 지금 적어도 수십 명이 넘는 악당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기에. 물론 혼자서도 상대할 수 있지만. 우리는 약속한 게 있었다. 남을 도울 땐 아무리 짧은 순간이라도 전략을 세우기로. 일단 가족 단톡방에 위치와 SOS를 보냈다. 그들이 올 때까지만 시간을 벌어보기로 했다. 아니 그때까지만 잘 숨어 있자고. 그것이 지금의 전략이다.
잠시 후, 어떤 무리가 문밖에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한의 정체를 알아내는 데 실패한 그들은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야 했다.
안 돼 안 돼. 한 놈도 놓칠 수 없어.
이한은 하는 수 없이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이렌 소리가 너냐?"
이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팔과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능청을 떨었다.
"혼자 왔어?"
저들끼리 킥킥거렸다. 키는 크지만 어려 보이는 얼굴과 마른 체형인 이한을 우습게 보는 중이었다. 마침 옥수수밭을 기어 다닌 탓에 행색도 아주 거지꼴이었다. 이한은 자신을 깔보는 저들을 이용하는 전략을 세웠다.
"형님들. 제 얘기 좀 제발 한 번만 들어주세요.
아니 제가, 6개월 간 밤낮으로 죽어라 일을 해서 3천만 원을 겨우 모았거든요? 근데 그 돈을 사귀던 누나가, 아니 그년이 들고 튀었어요. 잠깐 화장실에 간 사이에. 월세 낼 돈도 없어서 쫓겨날 처지예요 지금."
그는 최대한 불쌍한 모드로 연기를 했다.
"그래서?"
전략이 먹혔다. 무리 중 절반은 무관심했지만, 당장 떠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성공 아닌가. 당장은. 그리고 나머지는 이한의 이야기에 흥미를 보였다.
"건방진 년. 사실 저는 처음부터 그년을 믿지 않았어요. 사실 정식으로 사귄 것도 아니었고요. 그래도 혹시 몰라서 돈 가방에 위치 추적기를 달아 두었거든요. 찾아와 보니 여기였어요."
이한은 일부러 더 분노에 찬 사람처럼 거칠게 말을 내뱉었다.
"그럼 아까 사이렌 소리는 뭐지?"
"아 그거요. 사이렌 소리를 틀어 놓으면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뛰쳐나갈 줄 알았거든요. 다 나오면 그때 그년을 찾아가 내 돈 어딨냐고 물을 작정이었어요. 혼자 이곳에 들어갈 용기는 도저히 안 났거든요."
어찌나 감쪽같은지. 모두 속을 수밖에 없는 명품 연기였다.
"쯧쯧. 야 너는 얼굴 자세히 보니까 가만히 있어도 여자들이 돈을 갖다 바칠 상이구만. 호구처럼 당하고 사냐? 얼굴이 아깝다 새끼야."
다행히 모두 속은 분위기였다. 사채업자에게 빌린 돈을 갚지 못해 이한의 돈을 훔친 거라고, 알아서 생각해주기까지 했다. 가까이 오라는 시늉을 하더니 담배 한 대를 건네며 말했다.
"이건 알아둬. 여자는 찾아도 돈은 못 찾을 거야. 그 돈은 우리 거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