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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현모 Oct 27. 2024

어렵기만 하던 시집의 매력에 푹 빠지고

요즘 출근길에 책을 읽고 있다. 지난 한 달 가량 나름 적응 기간을 거치는 동안에는 출퇴근 시간을 그저 '보내느라' 바빠서 책을 읽을 여유가 없었는데, 이젠 새로운 출근지가 고정되면서 환승을 많이 하지 않고 한 자리에서 쭉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이동할 수 있게 되었기에 드디어 폰만 들여다보는 걸 넘어 책도 좀 볼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물론 여전히 높은 인구밀도 속에서 책을 꺼내 들고 읽는 건 쉽지 않지만... 그래도 좌석에 앉을 수 있게 되면 조금이라도 책을 읽으려 하는 요즘이다.


지난 주부터 출근길에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때 가장 먼저 챙겨다녔던 건 시집이었다. 얼마 전부터 시집을 조금씩이나마 읽으려 하고 있었던 데다, 마침 시집은 물리적으로 얇고 가벼우며 각 컨텐츠의 호흡이 짧아 바쁘고 여유 없는 이동 시간에도 잠깐씩 집중하며 읽기 용이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집은 게 이제니 시인의 시집이었다. 아침에 30분 넘게 지하철을 타고 가다 보면 비교적 높은 확률로 도중에 앉을 자리가 생겼고, 그럴 때마다 폰을 내려놓고 시집을 펼쳤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는 도서관에서 이제니 시인을 검색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시집이었다. 얼마 전 읽은 《읽는 사람》에서 여러 차례 언급된 시인들 중 한 명이 바로 이제니 시인이었고, '이렇게 여러 명이 언급할 정도면 분명한 매력이 있겠지' 싶어 시집을 고르면서 망설임 없이 그의 시집을 포함시켰다. 그런데 조금은 당황스럽게도, 처음 읽기 시작한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는 너무... 어려웠다. 앞서 읽은 다른 시집 두어 권에 비해 시 한 편 한 편의 길이가 긴 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나에게 어렵고 낯설기만 해서 잘 와닿질 않았다. 그래도 한 번 읽기 시작한 책은 최대한 완독하고자 하는 신념에 따라 성실하게 매일 조금씩 책장을 넘겼다. 이해가 되면 되는 대로,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그러던 중, 며칠 전 갑자기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내적 탄성을 질렀다. 정말 마법처럼, 그날 드디어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에서 시의 매력이 느껴지기 시작한 거다. 그것도 거의 백몇십 페이지쯤 읽은 후에야 말이다. 읽을 시가 열 편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시집의 매력을 깨닫다니. 이제야 이 즐거움을 알았다는 게 아쉽고 아깝기도 했지만, 솔직히 말해 책을 다 읽을 때까지도 어렵고 낯선 느낌이 가시지 않을 줄 알았기에 예상치 못한 이 변화가 진심으로 행복했다.


무엇이 그렇게 갑자기 좋아졌느냐 묻는다면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갑자기 마음에 와닿는 시어와 구절들이 생기고, '어, 이 시 마음에 드는데?!' 싶은 시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그러면서 다시 시집 초반부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내가 지난 며칠간 지나온 수십 편의 시들, 어려워하고 낯설어하며 멀게 읽었던 그 시들을, 시인과 시집의 매력을 알게 된 이 시점에 다시 읽으면 어떨까 궁금해진 거다. 그 시들을 읽어낸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 이 즐거움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던 건 분명하지만, 한편 '처음 만나는 순간'이라는 유일한 경험을 그렇게 어설프고 모자란 상태로 보내버린 게 아쉽기도 했다. 시인의 매력을 알아차린 후에 그 모든 시를 접했더라면 훨씬 좋았을지도 모르는데!


인생이란 이런 아쉬움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저울질하는 것 같다. 최고의 순간을 선사받기 위해 기다리고 타이밍만 재다 보면 결국 아무것도 경험할 수 없다. 어떤 것들은 조금 부족하고 아쉬운 채로 지나보내야 더 나은 그다음이 온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더 나은 그다음'이란 예기치 않게 찾아오기에 더 짜릿하다. 나는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를 읽으면서 '아직은 어렵지만, 읽다 보면 그 매력을 알 수 있겠지!' 하는 기대를 갖고 있지 않았다. 끝까지 아무것도 이해가 되지 않을지언정 묵묵히 읽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기대와 예상 한 점 없이 진도를 나가다 보니 소위 말하는 '아하 모먼트'라 할 법한 변화가 찾아왔다. 그 모든 건 내가 서툴고 어설픈 초반부를 거쳤기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일 테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는 이제 내가 소장하고 싶은 첫 번째 시집이 되었다. 일상적인 단어들을 전혀 낯익지 않게 사용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시집이었고, 시인의 작품들에 이어 수록된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해설은 시들 못지않게 정말 읽고 이해하기에 까다로운 내용이었지만 그마저도 어느 날씨 좋은 날 전시 입장 대기줄에 서서 단숨에 읽을 수 있어 뿌듯했다. 이 정도의 행복을 느끼면서 산다면 삶이 더할 나위 없이(물론 더할 나위는 언제나 있겠으나... 관용적인 표현으로) 만족스러우리라는 생각까지 한 경험이었다. 그렇게 나는 서툴게, 천천히, 시와 조금 더 사랑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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