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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호 Oct 24. 2021

공감의 미장센

 요즘은 생리적으로 성장이 빨라서인지 미디어의 학습기능으로 사고의 정립이 일러서인지 모르지만 ‘중 2병’이라는 단어가 ‘사춘기’라는 시적 용어를 지워버린 느낌이다. 여하튼 나는 고 1에 사춘기를 심하게 겪었고, 그 덕분에 남은 고교시절을 수학과의 처절한 싸움 끝에 전사하며 깊은 좌절의 시간을 보냈다. 대학은 가야 했다. 어떻게든 그래야 사람 구실 한다는 시절이었다.

 그래서 자리를 옮겼다. 맨 뒷줄에서 가장 교탁과 가까운 앞자리로. 콧구멍에 5백 원 동전을 넣고 돌리는 묘기로 즐거움을 선사하던 K군도, 몰래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끼우고 웃음을 참아가며 ‘2시의 데이트’를 함께 듣던 P군도 뒤로 한 채 말이다. 그리고 졸음이 올 때면 허벅지를 샤프심으로 찔러 가며 공부에 집중했다.


 학창 시절을 떠올려 보면 각자 좋아하는 자리에 습관적으로 앉았다. 누구는 뒷자리, 누구는 창가 등 취향이 달랐다.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들은 앞자리에, 입시와 학업에서 멀어진 학생들은 마음의 거리만큼이나 칠판에서 뚝 떨어진 뒷자리를 선호했다.

 특정 공간을 선호하는 것은 단순히 취향의 문제만은 아니다. 일종의 영역은 편안함이나 불편함의 이유가 되고, 다툼이나 갈등의 원인이 된다. 실제로 회사 사무실 자리 배치 과정에서 서로 얼굴 붉히는 상황을 경험했다. 팀 내 가장 선임과 가까운 자리, 그리고 서로 감정이 좋지 않은 사람의 옆자리를 피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그리고 누구는 자신의 모니터에 띄워진 내용을 타인이 보는 게 싫다는 이유로 통로를 피했고, 누구는 창가 자리가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다며 싫다고 했다. 공교롭게 자리를 정하는 책임이 나에게 주어지고 보이지 않는 자리다툼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고민 끝에 자리를 정해 열람을 해봤다. 불만이 여기저기서 불거졌다. 일일이 대화로 해결할 단계는 넘어선 셈이다. 결국 총대를 메고 모두가 피하는 자리에 내가 앉겠다고 공표했다. 그리고 남은 자리는 세상 가장 공평한 제비뽑기로 결정했다.


 어디 앉느냐는 심리가 결정하는가? 아니면 어디 앉느냐에 따라 심리가 결정되는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딜레마가 떠오른다. 인과관계의 딜레마, 어느 것이 먼저인지 논리적으로 밝히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어리석은 순환의 구조다. 인간의 심리는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고, 심리적 안정을 위해 주변 환경을 선택하거나 적극적인 변화를 준다. 마치 연극이나 영화의 연출자가 전하고자 하는 감정과 스토리를 위해 촬영장의 세트와 소품을 조작하는 미장센mise en scene처럼 말이다.


 편안함과 불편함은 정서의 문제다. 긍정적 정서가 형성된 사람들은 목표물에 더 시선을 오래 둔다. 정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우울과 불안 등 특징적인 정서(affective trait)와 기분이나 감정 등 상태적인 정서(affective state)다. 예를 들어 장기화된 코로나 19로 인한 사회 경제적 손실에서 오는 좌절, 실직이나 부모의 지병 등으로 오는 우울, 큰 시험을 앞두거나 부담이 큰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상황에서의 불안과 같은 정서는 시간이 흐른다고 해결되지 않는 특징적인 정서다. 반면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향이 좋은 커피를 마시며 감미로운 음악을 접했을 때 느끼는 기분이나 호감 가는 상대를 앞에 두고 나누는 대화에서 느끼는 감정은 상태적인 정서다.

 앞선 성공적인 소개팅을 위해 제안한 팁처럼 타인의 ‘상태 정서’에 집중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긍정적 정서는 일시적인 효과지만 시각적 주의력을 확장시키고 관점과 행동의 범위를 넓혀 준다. 쉽게 말해 관대해진다. 반대로 부정적 정서는 보수적인 태도를 자극해 상대가 신중하고 경계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성공적인 대화와 소통을 위해선 상대의 기분과 감정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 집은 뚝섬유원지역 부근이다. 여름밤 나선 한강변엔 돗자리를 깔고 친구들이나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인공암벽을 기어 오른 동호회 등반가를 고개를 치켜들고 구경하는 사람들, 2인용 자전거를 타고 서로 페달을 밟으라고 실랑이하는 연인들이 보인다. 그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주인과 산책 나온 반려견이다. 예쁜 강아지일수록 인기가 좋다.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주인의 함박웃음과는 달리 반려견의 표정은 어리둥절하다. 고개를 조금 돌려 보면 강아지 못지않게 눈길을 사로잡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아장아장 귀엽게 걸음을 떼는 아이들이다. 여기에 하나 더해 젊음의 에너지가 충만한 청춘들이다. 3B라 부르는 고전적 광고 기법은 미인과 아기 그리고 동물을 등장시켜 주목, 호감, 친숙함을 노린다.


 공감의 미장센으로 활용된 3B는 한 나라 대통령의 운명까지 바꿔놓았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반려견과 함께 백악관에 입성한 후 이는 전통이 되었다. 역대 대통령 45명 중 30명이 동참했고, 조 바이든 대통령의 반려견인 메이저는 최초의 유기견 퍼스트 도그에 이름을 올렸다. 미국 전체 가정의 대략 70퍼센트가 반려견을 키운다. 그렇다 보니 이런 퍼스트 도그는 순수한 가족의 개념을 넘은 정치적 노림수가 되기도 한다.

 그중 《밀리의 책》의 주인공인 부시 대통령의 반려견 ‘밀리’는 책이 엄청나게 팔리며 역사상 가장 많은 자선기금을 모은 반려견이 되었다. 그러나 최고의 퍼스트 도그는 단연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반려견 ‘체커스’다. 닉슨 대통령은 아이젠하워의 러닝메이트로 나와 공금 유용 의혹을 받았다. 정치적 위기에서 그를 구한 것은 일명 ‘체커스 연설’이었다.


 “지인으로부터 후원금을 받은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단 한 푼도 개인 용도로 쓰지 않았습니다. 국민과 유권자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개인적으로 특별한 선물을 받기는 했습니다. 작은 코커스패니얼인데, 6살 된 딸이 체커스라고 이름 붙였죠. 누가 뭐라 해도 체커스만은 키울 겁니다.”


 미국 전역에 생중계된 이 연설은 폭발적 반응을 불러왔고 공금 유용 의혹은 일순 사라졌다. 이를 계기로 닉슨의 인지도는 상승곡선을 그려 결국 백악관의 주인이 된다. 이 정도면 동물(Beast)과 아이(Baby)라는 공감의 미장센은 성공 확률이 높은 만능열쇠라 할 만하다.


 반면 미국을 넘어 세계적 밉상인 트럼프 전 대통령은 150년의 퍼스트 도그 전통을 깬 인물이다. 그는 미국인들의 반려견 사랑을 몰랐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특유의 오만함과 무례함이었을까? 어쩌면 그가 임기 4년간 이어갔던 단절의 언어, 그 서막이었을지 모른다.


 “언론은 반려견은 신뢰하면서 나는 신뢰하지 않죠.”


 이렇듯 비호감인 트럼프마저도 퍼스트레이디 멜라니아와 딸 이방카의 미모(Beauty) 덕분에 임기 초 후광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참고 : 미국 대통령들의 반려견 이야기는 필자의 목소리로 더빙된 2021년 1월 26일자 OBS 월드뉴스의 일부 내용을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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