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치
나의 가치를 값으로 매긴다면 얼마나 될까?
내가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사실 별로 없는 것 같다. 나 스스로 생각하는 나의 가치와 남들이 정하는 나의 가치는 종종 다를 때가 있다.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누군가의 가치를 매기고 따지는 일은 본래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요즘은 자기의 가치를 알리고 증명해야 하는 ‘자기 PR의 시대’다.
작은 취미에서부터 일상, 그리고 일에서까지 사람들은 다양한 콘텐츠로 자신을 브랜드화하며 선전하고, 그것을 통해 가치를 높이고 심지어 수익으로까지 연결시킨다. 그래서 ‘자신의 이미지’를 중요하게 여기고, 때로는 그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이미지가 많아질수록 오히려 사람들은 날것 그대로의 솔직하고 직설적인 것들을 더 갈망하게 되기도 한다.
사람의 가치는 그가 ‘무엇을 하느냐’ 혹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때가 있다. 어떤 이는 특정한 자리에서 더 빛나고, 또 어떤 이는 그곳에서 꼭 필요한 존재가 된다. 자신이 잘하고 인정받는 분야에서 계속 성장해 나가는 것, 그것이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는 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에는 자신의 가치를 분명히 알고 나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며 자신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요즘 읽고 있는 책 《몸에 밴 어린 시절》 에서는, 어릴 적 부모의 행동과 태도가 아이가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게 되는지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의 생각과 경험은 성인이 되어서도 깊은 영향을 미친다. 칭찬과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자란 아이들은 커서도 스스로를 늘 부족하게 느낀다고 한다. 특히 완벽주의 성향을 지닌 부모들은 아이의 학업이나 태도에 끊임없이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결과 아이 마음에는 ‘나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과 상처가 남게 된다.
나는 10살 아들과 9살 딸을 키우고 있다. 그 아이들을 바라볼 때면, 무언가를 잘하거나 칭찬받을 만한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그저 ‘존재 자체’로 너무 사랑스럽다.
《상한 감정의 치유》라는 책에서도 이런 구절이 있다.
‘아이가 걸음마를 배울 때, 잘 걷지 못한다고 다그치거나 혼내는 부모는 없다.’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빨리 걸어야 한다고 조급해하는 엄마도 없다. 아이가 스스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고, 넘어지면 도와주며,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그저 기쁨과 감격으로 가득 찬다.
아이들이 자라가면서 부모가 그 걸음마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때 느꼈던 ‘존재의 소중함’을 잊지 않는다면 그 아이는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 속에서 자존감 높은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다. 아이들이 힘들어하거나 실수했을 때 품어주고, 결과보다 과정을 격려해 주는 부모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언젠가 그 아이들이 자라 가정을 이루었을 때, 또 그들의 자녀에게 그런 부모가 될 수 있도록 내가 먼저 그런 엄마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한다.
한 사람의 능력과 성취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존재 그 자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내가 지금 아이들에게 하는 말과 행동이 그들의 평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생각하면, 내 안의 잘못된 가치관과 행동을 지금 당장 바꾸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나 또한 부정적인 생각의 근원을 따라 올라가 보면, 어린 시절 부모님에게서 비롯된 부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연결고리를 끊고 새롭게 설 수 있는 힘도 분명 나에게 있다.
예수님은 내가 뭘 잘해서 나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신 것이 아니다. 잘한 것이 하나도 없고, 죄 가운데 있었던 나를 그저 ‘존재 그 자체로’ 사랑해 주셨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가치는 얼마일까?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으로 나를 사셨으니, 나의 가치는 바로 ‘예수님짜리’ 다. 우리 아이들뿐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바라볼 때도 그 사실을 기억한다면 함부로 판단하거나 비교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오늘, 내 곁에 있는 이들에게
“너는 존재만으로 충분한 사람이야.”라고 그 마음을 표현하며
그렇게 오늘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