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 아웃
아침에 냉장고를 열었는데 야채가 떨어져 있었다.
아보카도와 사과, 토마토는 있었지만, 늘 챙겨 두는 Organic spring mix가 없었다. 결국 일찍 집을 나서서 마트로 향했다. 요즘 냉장고에서 가장 신경 써서 채워 넣는 것이 바로 이 야채믹스다. 싱싱한 것을 고르고 또 골라 한 박스씩 사 와도 일주일이 채 안 되어 비워진다.
그 이유는 남편의 식단 때문이다.
몇 달 전 건강검진 결과, 남편이 당뇨 전 단계에다가 콜레스테롤 수치까지 높게 나왔다. 약을 복용해야 할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평소 남편은 매운 음식, 자극적인 음식, 그리고 달달한 디저트를 즐겼다. 그날 이후 나는 결심했다. 이제는 남편이 좋아하는 대로 먹게 두지 않겠다고.
우선 아침 식단부터 바꿨다. 각종 채소와 과일을 올리브유와 발사믹 식초에 버무리고, 아보카도를 얹은 샐러드를 한 대접씩 내놓았다. 처음 먹었을 땐 남편이 갑자기 설사를 했다. 건강한 야채만 줬는데 왜 설사를 하지? 이상해서 찾아보니, 평소 잘 먹지 않던 야채를 갑자기 많이 섭취했을 때 흔히 생기는 증상이라고 했다.
그 뒤로 3~4개월 동안 내가 가장 열심히 한 일은 책 읽기 다음으로 남편의 식단을 챙기는 일이었다.
고기는 줄이고, 생선이나 닭고기, 두부 요리를 중심으로 식단을 바꾸었다. 데치거나 볶을 때마다 반드시 야채를 곁들였고, 단 음료와 간식은 모두 끊었다. 흰쌀밥 대신 잡곡밥을, 면 요리 대신 단백질 위주의 메뉴를 준비했다. 식사 전에는 홍초를 조금씩 마시게 하기도 했다. 나름의 최선을 다한 몇 달이었다.
내가 건강에 유난히 집착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당뇨로 오랫동안 아프시다가 돌아가셨다. 그 시절 엄마는 아버지의 식사부터 약, 주사, 병원 일정을 모두 챙기시며 일까지 병행하셨다. 많이 지쳐 있으셨고 힘에 부쳐 보였다. 아버지 또한 아파서 일을 못하게 되셔서 집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보이셨다.
갑자기 오는 병을 막을 수는 없지만 건강은 챙길 수 있을 때 관리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다. 남편이 다시 피검사를 했는데 결과가 예전과 다르지 않다는 게 아닌가?! 남편은 “유전이라 어쩔 수 없지”라며 태연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너무 허무하고 화가 났다. 나 혼자 너무 애쓴 건가 싶었다. 의심이 들어 병원에 다시 연락해 보라고 했다. 이메일로 결과를 요청했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다른 사람의 피가 잘못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검사를 다시 하라더니, 곧 또 아니라고 했다가 말이 계속 바뀌었다. 그 병원은 신뢰할 수 없는 말들만 하고 제대로 처리해주지 않았다. 열이 뻗쳤다. 그런데 남편의 미적지근한 반응이 나를 또 한 번 긁었다. 분명 자기 건강인데 다른 사람 얘기하듯 무책임한 태도도 맘에 들지 않았다. 나만 열심을 내고 있던 것 같아서 더 화가 났다. 다 하기 싫어졌고 짜증이 났다. 결국 참았던 화가 터져 남편에게 까지 표출했다.
그날 나는 생각했다. 내가 너무 열심을 냈구나. 열심을 내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잘못된 열심도 있다. 내 한계를 넘어서까지 밀어붙이는 것은 건강한 방식이 아니다. 내 안에 건강에 대한 염려와 불안이 있었다. 그래서 무작정 열심히 했고 그러면 될 거라는 막연한 생각에 사로잡혀 마음은 조급해졌다. 평안이 없었다. 그러다 예상외의 결과로 화가 났고 무기력함까지 찾아왔다. 세상 일은 언제나 뜻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실패할 수도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기대가 커질수록 실망도, 분노도 커지게 마련이다.
그날을 계기로 깨달았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너무 몰두하다 보면 내가 본래 해야 하는 일들이 흐트러질 수 있다. 열심히 하되, 내가 번아웃되지 않도록 조절해야 한다. 맡길 것은 맡기고, 내려놓아야 할 것은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하나님께 기도로 맡기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잘못된 내 열심히 하나님을 앞서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지금은 새로운 병원을 알아보고 있다. 남편이 바빠서 아직 검사를 다시 받진 못했지만, 이제는 결과에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좋은 점들을 보기로 했다. 남편의 식단을 바꾸며 나와 아이들까지 이전보다 훨씬 건강하게 먹게 되었다. 식사 후엔 간단한 운동이나 걷기 또는 산책을 하려고 노력한다.
식단은 단지 일시적인 변화가 아니라, 삶의 습관이 되어가고 있다. 계속해서 건강하게 잘해 먹고 싶어졌다. 이제는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보다 ‘꾸준히 즐겁게 이어가자’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가끔은 달달한 간식도 먹어 가면서 말이다.
오늘도 나에게 주어진 이 하루에 감사하며,
건강하고 멋진 하루를 기대한다.
그렇게 나는 오늘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