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 설레는 말이다.
아내의 유세가 정말이지 어처구니없이 심해졌습니다. 아 글쎄 집안에서 “담배 피우지 마라, 일찍 들어와라.”는 기본이고요. 툭하면 “안아 달라, 뽀뽀해 달라, 배 좀 쓸어 달라, 이불 꺼내 달라, 우리 이야기하자,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 등 요구사항을 줄줄이 사탕으로 늘어놓는데 이게 장난이 아닐뿐더러, 회사에서 일에 치여 피곤 그 자체로 돌아와 그냥 눕고 싶은 마음에는 정말이지 만만치가 않습니다. 안 해주면 될 거 아니냐고요. 뭘 몰라도 한참 모르시는 말씀 하시네요. 난리 납니다. 대번에 삐쳐서 말도 못 붙이는 것은 물론 아직 7개월이나 있어야 세상 빛을 볼 아기에게 미주알고주알 다 고자질을 한답니다 글쎄. 고자질을 어떻게 하냐고요. 이렇게 합니다.
“아가야 글쎄 아빠가 뽀뽀도 안 해주는 걸 보니 엄마를 싫어하는 게 분명하단다. 너는 나중에 아빠를 닮으면 안 된다.”라든가 “엄마가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는데 아빠가 슈퍼에 나가기가 귀찮으니까 아이스크림은 태아에게 좋지 않다고 핑계를 대는구나. 사실 아이스크림은 아기 네가 먹고 싶은 건데 아빠는 너를 좋아하지 않는가 보구나.”라는 식입니다. 안 들어줄 수 있는 상황입니까?
아내가 임신했냐고요.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아내가 임신을 한 것입니다. 이제 3개월 됐습니다. 그러니 어떡합니까. 임신한 아내를 이미 한두 번 겪어본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아도 반드시 그러해야 한답니다. 평생 간답니다. 싸울 때면 한 번쯤 밥상에 오르는 것은 당연지사고, TV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비슷한 경우가 나오는 경우 그때 또 한 번 피박을 쓴답니다. “심신의 고통, 피로, 내키지 않음을 절대 무릅쓰고 임신한 아내의 요구는 모두 들어주라 그래야 일생이 편하다.” 선배들의 애정 어린 충고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이런 게 행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행복합니다. 기쁩니다. 아기 아빠가 된다는 것만으로 까짓것 모든 것 참을 수 있습니다. ‘아빠’ 듣기만 하여도 이 얼마나 가슴 설레는 말입니까.
아내가 병원을 다녀왔습니다. 산부인과입니다. 이거 미혼들이 함부로 가는 데가 아닙니다. 감히 미혼인자가 가면 엄청나게 쪽팔리고, 문제가 있는 겁니다. 아내는 자랑스럽게 다녀왔습니다. 퇴근을 하니 아내가 사진을 한 장 보여줍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한 장 줄까?” 하기에 “네 주세요.” 하며 받아왔답니다. -아내 말에 의하면 사진은 잘 주지 않는 거라는데 사실여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아기랍니다. 거 뭐 초음파인가 뭔가로 찍은 거라는데 내가 보기에는 꼭 번데기 같은데, 아내는 “이쪽이 머리고, 이건 심장이고, 요렇게 옆으로 누워있으면 더 아기 같은데 누워있는 모습이어서 잘 표시가 나지 않는 거라.”는 등 사설이 많습니다. 하, 참. 요게 커서 사람이 된다니요. 그저 신기, 신기입니다. 아내의 임신을 안 것은 한 한 달쯤 됐습니다. 그 뭐 때가 돼도 할 걸 안 하니까 ‘혹시’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병원에 한 번 다녀오라 했습니다. 물론 아내가 먼저 느끼고 있었겠지요. 하지만 이런 것도 남편이 한 번쯤 관심을 가지고 미리 말해주어야 하는 아내입니다. “오빠, 축하해 2세가 생겼대” 그날 저녁 퇴근하는 나에게 현관문을 열면서 아내가 가장 먼저 한 말인데요, 정말이지 처음에는 아무 느낌이 없었습니다. 현실감도 없고, 내 눈으로 확인한 사실도 아니고,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참 시간이 지날수록 야릇해지는 게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 글쎄.
아기를 가지고 나서 아내는 시도 때도 없이 앉으면 눕고, 누우면 잡니다. 선배 경험자들에게 물어보니 다 그렇다고 하긴 하는데, 허리선 부근이 퇴적작용을 일으키며 어깨선과 일직선으로 평행선을 달리는 모습은 가히 지모신(地母神)의 모습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아!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도 아내는 또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것도 침대도 아닌 방바닥에 그냥 누워 삼순이처럼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래도 저 잠 속에 우리의 아기가 있으니…. 아내의 잠자는 모든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저는 토요일에는 떡볶이를 만들고, 일요일에는 다섯 벌의 와이셔츠를 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장모님께 일러주어야 할까요? 장모님은 아내의 도리에 대해 칼 같은 사람입니다. 만약 이러한 사실을 일러주면 아내는 장모님께 대판 깨질 각오를 해야 할 겁니다. 다시 한번 물어봅니다. “일러줄까요?”(1999.3)
※작가노트
누군가 말했다. “사랑은 지능에 대한 상상력의 승리고, 결혼은 경험에 대한 기대감의 승리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