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백수의 오락가락 독서일기/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마쓰이에 마사시
다채로운 색채 속에서 느끼는 무채색의 담담함, 마쓰이에 마사시(松家仁之. 1958~ )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원제 : 火山のふもとで 화산 자락에서)’를 읽게 된 것은 아주 우연이었다. 지난해 12월 27일 해가 다 가는 세모의 언저리에서 사무실 인근 서점을 어슬렁거리다 ‘나무의 시詩’ 같기도 하고, 사실은 ‘나무의 시-간’인 책 한 권을 샀다. 비 지난 안개가 숲 가득 자욱한 표지 사진이 마음에 들었고,-어린시절 고향집 마루끝에서 바라보던 비 온 뒤 앞산의 모습이 꼭 저랬다.- ‘내촌목공소 김민식의 나무의 인문학’이라는 책 설명에 혹하기도 했으며, 특별히 다른 무슨 책을 사겠다고 서점을 나온 것도 아니었다. 사실은 4~5년 전 한때 아내와 함께 목공을 배운 적이 있었는데 그 여운이 남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늦은 저녁 시간 특별히 할 일이 없는 나는 침대에 누워 협탁 위에 있는 ‘나무의 시-간’을 집어 들었다. 글 한편 한편이 독립되어 있는 이런 책들은 굳이 책을 처음부터 읽을 필요가 없다는 지론대로 관심 있는 글들을 골라서 읽다가 책의 끝이 궁금해 ‘나무를-헤아리며’라는 마지막 장, 에필로그를 펼쳤다. 그 첫 줄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아름다운 소설을 읽었다. 제목은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작가는 일본인 마쓰이에 마사시다.” 그리고 그 첫 문단의 글이 이어졌다. “글을 읽는 내내 쏴아~청량한 세례를 받는 듯했다. 이야기는 잔잔했고, 이른 아침 산책을 나선 듯 글에 흠씬 젖었다. 소설은 갈등도 반전도 위기도 없이 흘러간다. 등장인물은 시종 건축가들이다. 그런데 나무를 인용하고, 설명한 대목이 그렇게 정확할 수가 없었다. 어느 장면에도 그냥 ‘나무’라 쓰며 넘기지 않았다. 나무의 성격까지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며칠 후, 2019년의 마지막 날이었고, 모두들 점심을 먹고 조기 퇴근해 혼자 남아있던 ‘사무실의 시-간’이었다. 다시 인근 서점을 들렀다. 어슬렁거리지 않고 바로 컴퓨터에서 책의 존재를 확인했다. 일본 소설 서가에 딱 한 권의 재고가 있었다.-이런 류의 책은 알음알음 관심 있는 사람들만 찾는 책이어서 굳이 서점에서 유명 작가의 베스트셀러처럼 무더기로 비치해 공간을 차지할 필요가 없다.- 나무로 가득 채운 앞표지에선 맑은 바람 소리가 났는데, 표지의 나무는 사진이 아니고 그림이었다. 책을 만든 편집부에 문의해 보았으나, 자신도 무슨 나무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옅은 갈색의 띠지에 쓰여있는 “제 64회 요미우리 문학상 수상작, 데뷔작이라고 믿을 수 없는 완성도이다!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강렬한 묘사, 다자이 오사무의 깊은 사색, 마루야마 겐지의 선 굵은 뚝심, 무라카미 하루키의 스타일리시한 여백...”이라는 미사여구가 오히려 그 바람 소리를 막고 있었다.
2020년 3월 1일 새벽 2시, 삼일절 101주년이 되는 날 아이러니하게도 난 이 일본 작가의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모두 읽었다.-이날 난 두 권의 책을 읽었는데 다른 한 권은 최은영의 ‘내게 무해한 사람’이었다.- 책을 산 지 두 달 만이었다. 책을 살 때만 해도 금방 읽을 것 같았던 이 책은 오히려 금방 나의 관심에서 벗어났다. 청량하기는 했으나 무미해 감칠맛이 없었고, 갈등도 반전도 위기도 없는 글들은 지루했으며, 전문적인 나무와 건축에 대한 용어는 나 같은 문외한이 감당하기에는 벅찼다. 나는 내촌목공소의 목재 상담 고문 김민식이 아니었다. 그런 책이 또 페이지 수도 만만치 않아 무려 430페이지에 달했다. 근 한 달이 넘게 가방에 책을 넣고 다니기만 했다. 그렇게 2월이 다 가고 있던 어느날 잡은 책은 끝을 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다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목적이 있으면 의미가 부여되기 마련이다. 페이지가 넘어가면서 오래 씹은 밥처럼 문장 문장에서 단맛이 배어 나왔고,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 오히려 익숙하고 편안해졌다. 숲의 바람 소리가 청량해지고, 잔잔하게 일렁이는 물결이 눈부실 때쯤, 마른 장작 타는 소리가 들렸다. 늦은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는 소리였다.
#뱀다리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건축학과를 막 졸업한 주인공 사카니시 도오루가 무라이 설계사무소에 입사하고 아사마산(淺間山, 일본 혼슈 나가노현과 군마현에 걸쳐있는 높이 2,560m의 활화산) 여름별장에서 국립현대도서관 설계 경합 작업을 하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자전적 소설이다.-난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나중에 주인공의 아내가 되는 유키코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 되어 다시한번 여름별장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재미있지 않겠는가. 출판사에서 마쓰이에 마사시에게 한번 요청해 보시라.- 도서관 설계를 경합한 소설속 무라이 슌스케와 후나야마 게이이치는 실존한 건축가 요시무라 준조(吉村順三)와 단게 겐조(丹下健三)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글 제목의 “건축은 예술이 아니야, 현실 그 자체지”라는 말은 선생 무라이 슌스케가 주인공에게 한 말이다. 소설을 모두 읽고 시간이 되면 옮긴이의 글도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10페이지에 불과한 글이지만 어쩌면 419페이지에 달하는 소설 모두를 담고 있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