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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함을 견디는 것은 삶을 견디는 일이다

무념무상, 지루함 너머의 성실한 일상

by 부엄쓰c

외워야할 영어 스크립트는 하루 기본 다섯 개다. 많을 때는 두세 개가 더 추가된다. 매일 다섯 시간씩 내 삶을 외움에 내어주는 셈이다. 회사 수업이 끝나면 나는 집으로 향한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엔 늘 묘한 해방감이 섞여 있다. 아이를 직접 보고 챙길 수 있는 시간이 마음을 가볍게 한다. 아이가 밥을 먹고 태권도를 가면, 나는 필라테스에 간다. 매트 위에서 하루 동안 쌓인 마음의 먼지를 털어내는 순간만큼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다.


하지만 하루가 모두 이렇게 매끄럽게 흐르는 건 아니다. 집에 돌아와 아이와 마주앉아 공부를 하다가 숙제를 펴놓은 채 그대로 늘어져버릴 때가 많다. 쇼츠 영상에 정신을 빼앗긴 채 시간만 허공으로 흘러보낸다. 스크립트를 외우는 일은 지독하게 지루하다. 카페의 향긋한 커피도, 분위기 좋은 스터디 카페도 이 숙제 앞에서는 소용이 없다. 오로지 내 의지 하나로만 버텨야 한다. 이것은 마치 끝없이 반복되는 파도를 마주한 채 묵묵히 노를 젓는 일과 같다. 스스로와의 조용한 전쟁이다.


지난주 아이의 병원 일정 때문에 오후 수업을 조퇴했던 날이 있었다. 밀린 숙제와 녹음 파일을 처리하느라 하루에 열 개나 녹음을 해야 했다. 결혼식에 다녀온 친구들은 피곤하다며 일찍 잠들었다고 했지만, 나는 버스에서 기절하듯 졸고 집에 돌아와 다시 숙제 더미에 뛰어들었다. 아이가 친구와 놀러 간 그 짧은 시간마저 나는 커피숍 구석에서 또다시 숙제와 씨름했다. 쏟아지는 숙제의 양을 소화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게다가 때때로 직설적으로 쏟아지는 피드백은 차갑게 내 마음을 건드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산책으로 마음을 다시 가지런히 정돈해야 했다.



나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지루하지 않을 수는 없을까? 조금 더 빨리, 미루지 않고 끝낼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하지만 결국 내린 결론은 단순했다. 외움이라는 일은 애초에 지루한 것이었다. 아무리 궁리해봐도 특별한 묘수는 없었다. 결국 답은 무념무상, 성실히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다행히 내게는 성실함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어찌됐든 나는 묵묵히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며칠간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나와는 달랐다. 그녀는 숙제도 제때 하지 않고, 주말 숙제로 제출하면서도 태연히 "뭘 그런 걸 물어요."라는 말로 불성실하고 무례한 모습을 보였다. 선을 넘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결국 그녀에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내 길을 가기에도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으니까.


무념무상으로 버티는 길 위에서, 나는 지루함의 벽을 조용히 넘어가는 중이다. 성실함이라는 작은 등불 하나만 들고서, 그 길 위에서 나는 오늘도 조용히 나 자신과의 대화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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