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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당호수 나동선 Sep 29. 2021

그건 내가 해야 해

        검단산이 산 꼭대기서부터 붉은색으로 변해가고 있다.  조금 있으면  이 산자락 마을에도 서리가 내릴 것 같다. 정초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십일월 중순이다. 하릴없이 한 해가 이렇게 또 지나가고 마는가?  내 기억에는 금년에 뭘 하고 보냈는지 특별히 생각나는 일이 없다. 신우대 울타리 사이로 바람 빠지 듯 나의 날들은 흔적도 없이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새벽녘 일찍 깨진 잠에 눈 비비며 달력을 본다.  마지막 잎새 되어 달랑 한 장 남은 달력은 쓸쓸하기 그지없다. 어제 간 시간들이 내게 말한다. 오늘은 또다시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고.  기다릴 틈도 없이 팔당호수 위의 태양은 아파트 창문을  열심히도 드나든다.  내 방에 들어선 햇줄기는 나더러 정신줄 놓지 말고 열심히 살라고 한다. '삶의 동아줄을 끝까지 놓치지 말라'고 충고하며 사라진다.


        "야, 어멈이냐! 주말 농장 하며 배추 심었다고 하더니 잘 자랐냐? 올해 김장할 때 너희 배추 가지고 김장했으면 좋겠다." "아니 엄마, 그러면 좋겠는데 김장할 수 있는 정도로 배추가 좋지를 않아. 유기농 한다고 아무 농약도 안 했더니 배추마다 진딧물이 가득 달라붙어서 김장배추로 못써." "그 정도로 벌레 먹었어?  농약 안 하면 그렇구나. 그러면 작년처럼 절임배추 주문해야겠네.  네가 작년과 같이 절임배추 주문해라. 가을비가 오는 것 보니 날씨가 추워질 것 같다. 추워지기 전에 곧 김장해야 할 것 같다."  올해 연세가 아흔넷인 장모님은 금년에도 어김없이 김장을 생각하고 계셨다. 내가 결혼한 지가 벌써 사십여 년이 다 된다.


        내 기억에 장모님은 한 해도 김장을 거른 적이 없다. 장모님은 주변에 혼자 사는 친지들 뿐만 아니라 요새는 장가간 두 외손자 집까지 계산하고 김장을 준비한다. 내 아내는  작년에 장모님 댁에서 김장을 한 후 집에 와서는 "내년부터는 김장을 하지 말고 김치 사 먹어야겠어"하고  푸념처럼  불만을 했었다. 체력은 달려가는데 챙겨야 할 집들이 늘었으니 김장하는데도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랬던 아내도 친정어머니가 금년의 김장을 말씀하시니 별 수 없이 언제쯤 할 거냐고 묻고 있다.


        장모님은 장인 어르신 제사와 김장에 관한 일만큼은 절대로 본인이 직접 간섭하시고 챙긴다. 장인 어르신 제삿날이나 김장철이 돌아오면 언제나 본인이 미리 셈하신 대로 주관하셔야만 직성이 풀리는 듯이 보인다. 이 두 가지 일 만큼은 장모님한테 연중 가장 중요하고 제일 큰 행사다. 며느리나 딸한테 절대로 맡길 수 없고 본인이 직접 해야 한다고 생각하신다. 그들 모두 환갑 전후로 흰머리 카락을 날리고 있어도 당신한테는 이 두 가지에 일에 관해서 만큼은 어떠한 세월 셈법도 통하지 않는다.  내 아내도 처남댁도 몇 년 전부터  '김장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이제는 좀 쉬시라'라고 늘상 말씀을 드린다. 뿐만 아니라 장인 어르신 제사상 챙기는 일도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염려하지 말으시라고 수시로 강조하고 반복한다.


        들으실 때는 그렇게 하겠다고 반승낙하시는 것 같았는데도 그때가 돌아오면 언제나 예전과 변한 게 없다. 농수산물시장에도 일 년에 두세 번은 꼭 다녀오셔야만 한다.  제사상에 올릴 제수품은 손수 직접 골라야 하고,  김치에 들어갈 양념들도 손수 챙겨야 한다. 아내나 처남댁이 이런저런 것들을 사 오겠다고 해도  혼자 다녀오게 절대 내버려 두지 않는다. 오직 "그건 내가 해야 해" 다. 절대 너희들한테 맡길 수 없다는 강한 의사표시다. 이 일 만큼은 당신이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유일한 삶의 동아줄인 셈이다. 그래서 시절에 맞혀 그때마다 장모님을 시장에 꼭 함께 모시고 가야 한다.  오늘도 나는 아내와 함께 장모님을 모시고 농수산물시장에서 김장할 양념 거리들을 사러 간다. 장모님의 필수품인 걸음 의탁용 수레도 차에 함께 싣고서.    


       시간은 흘러가고 세월은 바뀌어 간다. 우리는 해나 달이 차고 기우는 대로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는 오직 해 뜨고 달지는 흐름에 따라 열심히 일상을 가꾸며 살아갈 뿐이다. 여타 필부들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나도 세상 물결 따라 열심히 살아왔다. 가끔은 죽도록 힘들 때도 있었지만, 한 때는 벌과 나비가 수시로 찾아주는 백합처럼 호시절도 있었고,  항상 젊고 함박웃음만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살았던 시절도 있었다. 수시로 스쳐 지나가는 훈풍이나 칼바람도  일상인 줄만 알고 별다른 대비도 없이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내 화려했던 꽃 수술은 부지불식간에 시들어 버렸고,  꽃잎은 떨어져 땅바닥에 뒹굴고 있음을 알았다.


        그 아름답던 내 청춘도 어느덧 황혼이 되어 서산에 지고 있는 해가 되고 말았다. 그때도 몰랐지만 이제는 딱히 챙기고 이루고자 하는 목표도 없다. 흔히 '마음 비우고 가볍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들을 한다.  마음에서 나오는 욕심 버려보니 세상은 편하다. 그런데 왠지 가슴이 싸늘하다. 머리는 가벼운데 가슴에는 뭔가가 허전하게 느껴진다. 세월은 점점 가고 눈도 어두워져 가는데 늘 허전함은 가실 줄을 모른다.


        나는 지금 농수산물시장 주차장에서 김장 양념거리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서 오늘 나는 장모님으로부터 한 가지 중요한 것을 배웠다. 말로 배운 게 아니다. 장모님은 허리 구부정하고 김칫독 하나 직접 옮길 힘은 없어도 '그건 내가 해야 해'가 있다. 그건 당신께서 절대로  친 딸이나 며느리한테도 양보할 수 없는 인생 최후의 보루인 것이다.  당신이 절대 놓칠 수 없는 유일한 동아줄이다. 그건 해마다 오직 당신 만이 해야 한다. 그 일을 놓는 순간 당신은 정신줄 놓는 것이다. 그래서 제사나 김장 때를 당신 머릿속으로 년 중 내내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또 그것을 당신이 직접 진두지휘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일은 당신이 이 세상에 살아 있음을 온몸으로 증명해 보이는 아우성이다.


        이제야 정신이 바짝 든다. 내 동아줄은 있는가?  '그건 내가 해야 해'를 찾아야 한다. 어느새 장모님이 산 물건들이 도착했다. 차에 실었다. 오메! 그런데 나는 이런 동아줄을 언제 잡는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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