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3주 후 화, 수, 목요일 어때? 다른 약속은 없지?"
"왜? 뭔 일 있어?"
"아니, 인터넷 보니 그날 속초에 있는 호텔에서 숙박비를 평소의 반값에 특가로 판매한다고 광고가 떠서..."
"그래, 그럼 가세. 다른 약속이 있다면 다른 날로 바꿔 볼게"
"그럼 예약한다."
아내는 어느새 호텔 예약을 마쳤다고 한다. 하루 놀고 하루 쉬는 일도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이제 몇 년을 집에서 놀다 보니 이런 생활도 요령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루가 지루하지 않고 집에 같이 있는 아내한테도 덜 부담을 준다. 나는 아침마다 아내와 함께 모닝커피를 즐겨 마신다. 아내는 네스카페 커피를 나는 베트남 산 G7 커피를 좋아한다. 아내와 함께 마시는 아침 커피 한 잔은 단조로운 삶에 여유로움을 주는 활력이 된다. 특히 나는 새 봉지 뜯을 때 짙게 펴나 오는 커피 향기가 더없이 좋다.
커피 한 잔과 함께 오늘 하루는 어떤 약속 없느냐고 서로 묻는다. 그 걸로 오늘의 대화도 대충 끝나면 나는 내 방에서 이런 글쓰기, 성경이나 여타 잭 읽기 등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 마음은 앞서는데 내 생각을 정리해서 글로 표현해 내는 것 자체는 어려운 것 같다. 내가 쓴 글을 이 세상에 펴 보이고자 하는 의도로 시작한 것은 결코 아니다. 한 주제를 며칠이고 생각하고 이를 글로 엮어내고 다듬는 일이 내겐 큰 즐거움이요 행복이다. 놀고먹는 백수인 내가 이 지루한 삶을 탈출할 수 있는 출구를 찾은 셈이다. 단어 하나 토씨 하나를 다시 생각해보고 잠자리에 들었다가도 다시 일어나 지우고 고치기를 수 없이 반복한다.
성경책을 7회 정도 정독하고 나니 이제 조금은 큰 틀에서 말씀이 조금은 보이는 것 같다. 삼국지도 몇 번 읽었지만 부분마다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는 성경이 더 많은 것 같다. 성경책에 나오는 소제는 교훈적일 뿐만 아니라 더 흥미진진해서 파고들게 하고 우선 그 테마 수가 무궁무진하다. 가끔 지인들과 산행 등을 할 때 지루한 경우 재미있는 성경 한 구절을 구술체로 설명해 줄 수 있는 정도는 된다. 듣는 이가 귀담아들을 때면 보람도 느낀다. 요즘에는 한글과 NIV 영어로 된 성경책을 영어로 보고 있는데 그 재미가 다 표현키 어려울 만큼 크다. 우리 한글로 표현된 성경 말씀 중 가끔은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들이 있다. 영어로 읽다 보면 우리 한글보다 더 쉽게 서술된 부분에서 정확한 뜻을 알고 났을 때의 그 기쁨이란 말로 표현키 어려운 또 다른 큰 즐거움이다.
이렇게 하루하루 소득 없이 매일 놀고 있는 나에게도 어떤 날은 몹시 짧게 느껴진다. 어느 사이 3주가 다음 주로 다가오자 아내는 속초 호텔 가기 전날인 월요일은 별일 없느냐고 묻는다. 나는 아무 약속이 없다고 하자 인제군에 있는 자연휴양림에서 1박을 하고 가자고 한다. 마침 취소된 방이 있단다. 아내는 인터넷과 관련된 정보에 정통하다. 내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나보다 컴퓨터를 더 잘 활용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 부부는 자연휴양림에서 1박 그리고 속초 호텔에서 2박 등 3박 4일의 7월 중순 이른 휴가를 가게 되었다. 월요일 아침 아내가 짐을 싼 것 보니 큰 가방이 세 개다. 내가 챙긴 것은 우리 두 사람이 산에 갈 때 신을 등산화가 전부다. 날마다 놀고 쉬기를 반복하면서도 집을 나서 여행을 간다는 것은 누구나 느끼는 설렘인 것 같다.
월요일 오전 출발 전부터 하늘은 온통 먹구름으로 가득하다. 내가 곧 비가 올 것 같다고 하니 아내는 특별히 볼거리를 미리 정한 것도 없으니 비가 오면 더 좋다고 한다. 동홍천 IC를 지나니 비가 오기 시작한다. 2년 전에 왔을 때는 에어컨 시설이 없어서 좀 답답했었는데 이제는 이곳 휴양림에도 에어컨이 있어서 눅눅한 날씨에도 쾌적하고 좋았다. 이웃집에도 사람들이 들어왔다. 깊고 짙은 숲에 둘러 싸인 산계곡 오후는 너무 고즈넉하고 여유롭다. 코 끝에 들어오는 공기는 정말 신선하고 풋풋한 풀향기 맛 그대로다. 밤이 깊어오자 끊임없는 개울 물소리는 4월 못자리 판에서 우는 개구리 떼 소리보다 더 크게 들린다. 아내는 여기서 일주일만 더 있으면 좋겠단다.
이튼 날 화요일 오전 여유롭게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비는 가랑비처럼 밤새 내렸고 지금도 오고 있다. 속초 호텔로 가기 전에 진부령을 넘에 어딘가를 들렀다 가고 싶었다. 간성을 향해 가고 있는데 건봉사라는 푯말이 보인다. 아내에게 물어보니 자기는 초등학교 때 한 번 가본 기억이 있단다. 얘길 들어보니 집안 일로도 사연이 있는 절이었다. 삼국시대인 520년에 창건되었고 758년 신라 경덕왕 17년에는 염불만일회(10,000일 염불 모임)를 열어 우리나라 만일회의 효시가 된 절이기도 하였다. 지금은 신흥사의 말사가 되었으나, 한 때는 31 본산의 하나가 되어 9개 말사를 관장하기도 했다고 한다. 6.25 때 피아간의 점령으로 거의 소실되었고 현재까지 복원 중에 있는 유서 깊은 큰 절이었다.
휴가 3일째 되던 수요일은 설악산 비선대를 갔다. 평일날 오전이라 설악동은 한산했고 큰 나무들로 우거진 오솔길은 우리 둘이 걷는데 이보다 더 좋은 길은 없을 것 같다. 간간이 오가는 사람들, 깊은 계곡, 맑고 많은 물, 우렁찬 물소리, 높은 산봉우리, 깎아지른 듯한 바위들, 검푸르고 울창한 숲, 그 사이를 나는 새와 함께 어느덧 우리 부부는 천국에 있는 느낌이다. 인터넷 검색으로 오늘 이곳으로 휴가를 가자고 했던 아내가 새삼스럽게 너무 고맙고 감사하다. 어제 건봉사에 있던 만해 한용운 선생님의 시비에서 감명 깊게 읽었던 시가 머리를 스친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까닭을 그리고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까닭을 여기 비선대가 다시 일깨워준다.
<사랑하는 까닭> : 한용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은퇴 후 점점 나이테만 늘고 삶에 대한 목표 없이 이 세상에서 일엽편주 되어 홀로 떠 있는 요즘이다. 이런 나를 위해 나의 백발도, 나의 눈물도, 나의 죽음도 사랑해 주는 오직 당신뿐인 아내에게 이 시를 바친다. 당신과 함께여서 마음도 몸도 너무 편하고 더없이 오붓했던 7월 중순의 어느 이른 휴가를 갖게 해 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