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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당호수 나동선 Sep 26. 2021

조선말 원세개는 인간 거머리였다.

임오군란부터 청일전쟁까지 원세개(위안스카이)의 행적과 적패들

        시골에서 모내기를 해봤거나 냇가에서 고기를 잡아봤던 사람이라면 한두 번은 경험했을 일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머리가 다리 정강이에 붙어 사람 피를 빠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을 것이다. 거머리(leeches)란 무엇인가? 백과사전에 의하면 '대부분 담수에서 살지만 일부는 바다나 습기가 있는 육지에서도 산다. 몸은 납작하며 고리 모양의 주름이 많다. 거머리들은 몸의 앞쪽과 뒤쪽 양 끝에 근육질성 흡반(빨판)을 가지며, 앞쪽에 있는 흡반 밑에 입이 달려있다. 대부분의 기생성 거머리들은 척추동물 숙주에 붙어서 피부를 물어뜯은 다음 많은 양의 피를 빨아먹는다. 숙주에 달라붙은 지 30분 이내에 거머리는 몸무게의 10배에 해당하는 피를 빨아먹는다.'라고 했다. 사람이나 소처럼 거머리와 상대가 안될 정도의 몸체라면 거머리에게 피를 빨림은 별 대수가 아니다. 그냥 떼어버리거나 지 스스로 먹을 만큼 먹고 나가떨어지면 그만이다. 그러나 개구리나 붕어 여타 물고기한테 거머리가 달라붙었다면 그 개체는 피를 다 빨리고 결국 죽고 만다. 조선말 고종의 운명도 그와 똑 같았다. 원세개라는 거머리와 같은 외세에 빨려 국력이 소진되고 종국에는 파멸로 갔다.


        1882년 고종과 민비 세력들은 개화에 따른 군영을 개편했으나, 조정에서는 구식 군인들에 대한 군료(급여)가 13개월이나 밀려 있었다. 구식 군인들의 원성과 항의에 못 이겨 밀린 군료를 주면서 겨와 모래를 섞어주고 그 양도 반이나 모자라게 주었다. 이에 항의하며 일어난 구식 군인들의 반란이 바로 임오군란(음.1882.6.9)이다. 이때 군료 관리인 선혜청 당상관 민겸호와 전 당상관이었던 경기관찰사 김보현이 구식 군인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당시 최고 실권자였던 민비는 궁녀로 위장해서 장호원에 있던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도피해 숨었다. 다급해진 고종과 민씨일파는 청나라에 군대 파견을 요청했다.


        고종은 사태수습을 위해 이심전심으로 구식 군인들과 통하던 대원군에게 전권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전권을 맡은 대원군은 민비의 생사도 모른채 국장을 선포함과 동시에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해 갔다. 이러는 사이 일본은  7월 3일경에 1,500여 명의 병력을 제물포에 상륙시켰다. 청나라도 재빨리 3천여 명의 대군을 조선에 파병키로 결정했다. 총사령관 오장경(우창칭)은 7월 7일 남양만에 도착했고 12일에는 모든 청군이 한성 숭례문 밖에 진을 쳤다. 이름 없던 일개 무관 행군사마라는 미관 말직 23세의 원세개(위안스카이 1859~1916)도 이때 조선에 들어왔다. 그의 친족인 삼촌 원보향 등은 당시 청나라 정권 실세 이홍장의 고위관료였고 조선에 오게 된 것도 그 뒷배가 되었다. 총사령관 오장경이 원세개를 신임한 배경이기도 했다.   


        조선에 도착한 청군은 임오군란 발생의 이면에는 대원군의 조종이 있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청군은 결국 군란 책임자인 대원군만 제거하면 일본군과의 협상  국제관계를 조기에 수습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청군은 한성에 주둔하자마자 대원군 제거 계획을 신속히 진행해 갔다. 7월 13일 오전 총사령관 오장경 등이 예를 갖춰 대원군을 예방했다. 그러자 그날 오후 4시경 대원군은 몇 명의 수행원만 대동하고 답례로 총사령관 오장경을 방문했다. 그 장소는 막료 황사림(황스린)의 군막이었다. 저녁 무렵까지 이런저런 필답이 오가다가 오장경이 대원군에게 명령조로 즉시 수레를 타고 청나라 진으로 가서 청조정의 조치를 기다리라고 다. 그러자 대원군은 크게 노하며 항의를 했다. 이 순간 대원군의 서슬 퍼런 대로에 찬 모습을 상상해보라. 총사령관 오장경은 잠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때에 오장경을 수행하던 원세개가 지체하면 큰 변고발생한다고 하면서 어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대원군을 억지로 가마에 태웠다. 거의 납치나 다름없었다. 대원군은 졸지에 청나라 진으로 끌려가 권좌에서 멀어졌다. 원세개는 이를 계기로 출세의 가도를 달리는 발판이 되었다. 그는 출세라면 물불을 안 가리는 지극히 저돌적인 출세지향적인 인간이었다. 시국을 읽는 그의 상황판단과 대처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순간이기도 했다.


        이후 고종은 청군에 임오군란을 일으킨 잔당들을 소탕해주라는 간청을 했다. 이때  원세개는 무지막지하게 이들을 체포 처형하며 군란을 평정하는데 군계일학의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그의 나이 불과 23세였 고종의 이러한 간청을 보고 조선 조정의 무능함을 이미 간파해버린 것이다. 총사령관 오장경 등은 조공이나 받던 소극적 관계에서 탈피해서 종주국으로서의 위상을 되찾고 싶었다. 일본은 한사코 조선과 청나라를 떼어 놓으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선이 자주국임을 주장했다. 원세개는 총사령관 오장경의 배려로 청군의 군사문제를 관장하며  고종의 친위군 창설까지도 맡게 되었다. 그의 권세는 날로 승승장구하여 1883년 11월에는 그의 휘하에 있던 조선 병사의 수가 2천여 명에 이르렀다.


        1884년 10월 조선에서 김옥균 등 개화파가 일본의 힘을 배경으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개화파는 고종을 조종하며 개혁을 시도했다. 당시 청나라는 베트남에서 프랑스 군과 대치중으로 실력자  이홍장은 조선 문제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원세개는 본국의 승인도 받지않은 채 독자적인 판단으로 병력을 이끌고 궁궐로 쳐들어가 일본군을 제압했다. 결국 고종을 개혁파 수중에서 구출하는 등 정변을 성공적으로 평정했다. 그의 위상은 날로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원세개는 갑신정변 평정시 일본군과의 무력충돌 책임자라는 이유로 그해 11월 청나라로 당분간 소환되기도 했다. 그러나 청나라 이홍장 등의 신임은 더욱 두터웠다.  다음 해인 1885년 8월 연금에서 해제된 대원군과 함께 조선에 다시 왔다. 원세개는 그동안 조선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1885년 11월 이홍장으로부터 조선 주재 리교섭통상대신에 임명되었다. 과거 행적도 그랬지만 특히 이때부터 그의 모든 공적은 조선에 대한 적패가 되어갔다. 물론 조선에는 고스란히 회생불가의 크나큰 손실로 이어졌다.


        총리교섭통상대신으로서 원세개의 세도는 거칠 것이 없었다. 부임하자마자 개항 중이던 인천.부산.원산에 곧 분판상무위원을 배치하고 세관수입을 감독케 했다. 그는 조선의 정치. 외교는 물론 청상의 경제활동을 보호해주며 조선의 경제권을 옥죄어 갔다. 또한 고종의 폐위까지 거론하며 종주국으로서의 종속관계를 부각해 조선 조정에 군림했다. 원세개로부터 고종 폐위론이 나오자 조선 조정은 크게 위축되어 사안이 생길 때마다 원세계의 지도와 간섭으로부터 벗어나지를 못했다. 조선 조정이 외국에 주재하는 공사 파견마저 간섭하고 나섰다. 종속관계를 주장하며 외교에서 준칙3단을 만들어 이를 지키게 강요했다. 주재국에 파견된 공사가 주재국의 관리를 만나기 전에 청나라 공사에게 먼저 보고하고 그와 함께 대동해야 하고, 연회에서는 청나라 공사의 뒷줄에 앉아야 하며, 중대사건은 청과 사전에 상의하라는 식이었다. 원세개의 이러한 전횡 행위는 조선을 대외적으로 크게 속박하고 말았다. 고종이 청나라의 실권자 이홍장에게 원세개의 면직을 간청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원세개를 크게 신임하며 두둔하고 비호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그의 적패는 더해만 갔다.  일본 상인들과 경쟁하던 청상들은 그의 후광을 업고 그 세력을 날로 키워갔다. 당시 조선의 가장 큰 수출 품목은 홍삼이었는데 청상들이 이를 밀수출하려다가 조선 해관원에 적발된 일이 있었다. 그러자 청상들은 조사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조선 해관을 습격하고 난동을 부린 일도 있었다. 당시 조선 통리아문에서는 외국인에게 개인마다 지금의 신분증(여권?)에 해당하는 호조(護照)를 발급했는데 원세개는 이를 무시하고 이름이 공란인 호조를 한꺼번에 수십장씩 발급받아 청상들에게 거의 무제한으로 남발하였다. 청상들의 세가 날로커 가자 조선 상인들이 밀집한 종로의 시전을 비롯해서 상거래 질서가 엉망이 되어갔다. 1890년 정초에는 한성 상인들이 리아문 앞에 집결해 연좌시위를 하기도 했다. 요즘의 모습대로 데모였다.  뿐만 아니라 평양 등 해안 각지에는 청상들이 쌀.콩.인삼.소가죽 등을 해관을 통하지 않고 국외로 밀수출하였다. 통관을 거치지 않으니 관세수입이 생길 리 없었다. 조선 조정의 밀수 무역 피해가 너무나 컸다. 원세개에게 이의 시정을 요구해도 청상인들에게 유리한 주장만 할 뿐 소극적인 자세로 방관했다.   


        조선 조정이 재정의 어려움에서 탈피코자 해외 차관을 추진해도 원세개의 패악질을 피할 수 없었다. 1885년 그는 조선이 독일로부터 1푼 2리로 10만 원의 차관 도입을 추진하자 년 리 1푼으로 낮춘 청나라 차관을 쓰도록 했다. 이후 비밀리에 조선 조정에서 추진하는 차관 도입건마다 원세개의 방해로 무산되고 오직 청나라의 차관만을 쓰게 했다. 청나라 자신조차도 서양 열강들의 이권다툼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서 조선에 대한 종속관계를 계속 유지. 강화하려고 했다. 고양이 쥐 생각한다는 속담이 이런 경우에 딱 맞는 것 같다. 조선 재정은 갈수록 악화되어 미국,프랑스,영국 등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해 청나라로부터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원세개의 개입으로 실패로 끝났다. 차관 도입의 실무청인 외아문에는 원세개가 심어놓은 첩자들이 넘쳤다. 어디 이뿐인가. 전선설치,통신설치, 해운 윤선 운항 등 수입이 될만한 사업이라면 조선조정에 대한 원세개의 간섭과 그 해악은 끝이 없었다. 1894년 여름  청일전쟁이 일어나 불길한 전운이 감돌자 재빨리 청나라로 도망갈 때까지 10년 이상 그의 이러한 패악은 계속 이어졌다. 도망갈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35세였다. 그의 적패들을 어찌 다 기술할 수 있을까?


        이는 고종과 민비일당의 자업자득이었다. 임오군란 당시 아무런 대비책도 없이 청군을 불러들였고, 이는 결국 일본군까지 불러들인 결과를 초래했다. 비록 그들이 갑신정변 후 진조약으로 조선에서 병력을 철수시켰으나 그 폐해는 오롯이 원세개로 승계되고 강회되었다. 뿐만 아니라 민비를 비롯한 탐관오리들의 재정탕진과 국정농단에 고종은 수수방관 내지 우유부단함 그 자체였다. 국정은 뒷전이고 오직 민비일당들의 자기 배 채우는 일이 우선이었다. 임오군란 후 한성치안을 원세개 등 청군에 부탁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재정이나 국방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나라. 일본을 비롯한 서양 메기 떼는 하나같이 조선을 물어 뜯기에 바빴다. 그런 조선에 청나라 원세개라는 인간 거머리가 조선의 상처에 엄청 큰 빨판을 내리꽂고 10년(1882~1894) 이상 피를 빨아먹은 것이다. 어찌 조선이 망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 부끄러운 자화상. 생각할수록 낯 뜨겁고 피가 거꾸로 흐름을 느끼는 것은 어디 나 뿐이겠는가?                   

       


참고자료 1. 한국민족문화 대백과(네이버)

                2. 한국근현대사 사전(네이버)

                3. 감국대신 위안스카이(원세계)

                    (이양자 저)

                4. 한국사신론(論)(이기백 저)

                5. 한국통사() (한우근 저)

                6. 한국통사() (박은식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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