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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당호수 나동선 Sep 27. 2021

조선, 1894년 여름과 2021년 한국(1)

1894년 조선의 급변하는  대내외 시국상황​


        <전봉준과 갑오농민전쟁>의 저자 우윤은 이 책에서  1894년 전후의  백성들의 삶과 나라의 국정문란 모습을 이렇게 쓰고 있다.  "희망이라곤 털끝만치도 보이지 않는 찢어지는 삶인 줄 아내인들 몰랐을까...... 아내의 삶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아내를 묻는 전봉준은 그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미웠고, 아무리 일해도 허리 펼 날 없는 세상이 저주스러웠다.  '배 터져 죽는 고루거각(高樓巨閣) 의 양반놈들, 힘없는 농투성이 등쳐먹는 지주놈들, 에이 망할 세상......'"주1 이라면서 "지금 양적(洋賊)이  조선을 침략하여 위로는 나라 정치를 어지럽히고, 아래로는 민중의 생활을 파탄지경에 이르게 하였음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 게다가 특히 왜놈은 조선을 삼키려는 야심을 채우기 위해 물불도 가리지 않고 있고, 여기에 지주놈의 착취는 물론이거니와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 조차 덩달아 악랄한 방법으로 갖은 수탈을 다하고 있으니, 우리 조선 인민이 살 길은 떨쳐 일어나서 양적과 섬 오랑캐들을 쫓아내고 외척 민씨 집단을 몰아내는 길뿐이네."주2   라고 했다.  "또 민씨들은 감사와 유수(留守)를 해마다 바꾸고 한 달에 한 번씩 인사행정을 단행하면서 그때마다 몰려오는 전국의 부민(富民)들에게 참봉이나 도사(都事), 감역(監役) 등의 벼슬을 팔아넘겼다. 그리고 해마다 10여 차례씩 과거를 실시하고, 기부하는 돈의 액수로 합격 여부를 결정하였다"주3고 했다.


        조선 내부는 마치 악성 바이러스가 온몸을 덮어가는 형국이었다. 고종을 비롯한 조정 지도부는 시국에 대처할 재정도 병력도 없었다. 아니 국정을 감당할 능력 자체가 없었다고 함이 더 옳은 표현인 것 같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스스로 일어나 동학농민전쟁을 일으켰다. 그러자 민비일당은 이번에도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고 말았다. 벌써 임오군란, 갑신정변에 이어 세 번째다. 일본은 청국이 조선에 파병한다고 통고하자 곧바로 파병을 했다. 결국 조선조정은 호시탐탐 조선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일본군으로 하여금  아무런 장애물 없이 조선에 들어올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고 말았다. 고종이나 민비일당은 갑신정변 후 1885년 청나라와 일본 간에 맺은 진조약 내용에 청·일의 군대가 장차 조선에 군대를 파병할 때는 서로 상대국에  알려야 한다는 내용을 간과했거나 무시했다. 이 위정자들의 무능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이것이  조선의 운명이라면 어쩌랴.  당시 급변해 가는 대내외 시국 상황이 얼마나 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는지 한 번 정리해 보자.주4


ㅇ1893년

  -11월 ·전봉준 등이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대해  4개 결의 사항의

              사발통문을 작성하고 거사일 모색  


ㅇ1894년

  -1월  ·동학농민운동 발생. 농민군 고부관아 점령(10일)  

  -2월 ·상해에 피신 중인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을 홍종우가 피격살해.

             → 조정에서 김옥균 시신을 노량진에서 육시처참 효수

   -3월 ·농민전쟁 본격 개시-전봉준 등이 전라도 무장에서  창의문(倡義文)

              선포 및 농민군 1차 기병(20일)


   -4월 ·양호초토사 홍계훈이 지휘하는 조정 최정예군 군산항 도착(6일)

          ·동학농민군과 전주감영군 간의 황토재 전투(7일)  농민군 승리

          ·농민전쟁이 충청도, 경상도에 번져 정부의 지방통제 불능상태가 됨

          ·동학농민군과 조정 최정예군 장성 황룡촌 전투(23일) 농민군 승리

          ·홍계훈이 조정에 군대증원 요청

          ·민비정권은 조선주재 통상대신 원세개(위안스카이)에 청군 파병 요청

           (원세개는 조선이 청의 종주국임을 강력 주장하며 당시 조선의 외교,통상권을 실질적

            으로 장악하고 있었음)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점령(27일)

          ·청나라 이홍장이 일본에 진조약에 따라 조선에 파병사실 통고

  -5월  ·청군(1,500여명)의 아산만 상륙(5일)

          ·청일간에 체결한 진조약으로 선전포고를 받은 일본군은 제물포에

           상륙(6일)

           → 일본은 제물포에서 한양 사이에 8,000여명의 대군을 포진시킴

          ·정부군과 동학농민군간에 전주화약(全州和約) 체결(7일)        

          ·조선 정부는 일본이 독단으로 군을 파병한 것에 항의하고 철병 요청

          ·일본군의 경복궁 불법점령(21일)으로 고종은 일본군의 감시하에 있게

            되고, 4대문을 일본군이 완전히 장악함.

          ·일본 선전포고 없이 아산만 풍도에서 청나라 지원군을 태운 함정 공

           격으로 청육군 1,200여명 전사(23일)

          ·청일간 아산만 부근 성환 전투에서 일본군  압승(28일)        

          ·일본이 양국 공동철수 대신 청나라에  조선의 내정 공동 개혁안 제시

           → 청나라 거절

 -6월  ·임오군란 후 12년간 조선 조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청나라 원세

            개 본국으로 도망감

            →청의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종주권 및 상권  상실

          ·조정에 친일내각 수립(25일) 흥선대원군은 섭정, 김홍집은 영의정   

          ·조정에 개혁추진기구인 군국기무사  설치     

 -7월  ·청국에 대해 일본이 공식적으로 선전포고(1일)

          ·조선 친일내각은 일본과 '일본군의 진퇴와 식량준비 등 편의제공'을 위한 "조일맹약체결"

 -8월  ·청일간의 평양성 전투에서 일본군 승리

         ·청군·대원군·전봉준연합하여 일본군과 싸우자는 내용의 대원군 편지가  일본공사 오오또리에게 발각   

-9월 ·일본해군이 황해전투에서 청국함대 격침 및 황해 제해권 장악

        ·전봉준 전라도 삼례에서 2차 기병결정(12일) 및  서울진격준비

 -10월 ·일본군 청나라에 진격하여 요동반도 상륙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조선관군(연합군)과의 (조일)전쟁 개시

 -11월 ·동학농민군, 일본군·조선관군(연합군)과 전투

           →공주 우금치 등에서 농민군 대참패(농민군 9,000명 이상 전사)

         ·일본군이 청나라 여순, 대련 점령하여 요동반도 장악

         ·동학농민군의 연속된 참패로 전쟁 동력상실

 -12월 ·동학농민군 지도자 체포됨. 김개남(1일), 전봉준(2일), 손화중(11일)

            → 동학농민전쟁 사실상 종료  


ㅇ1895년

  -2월 ·일본군이 산동반도의 웨이하이웨이에 있던 청나라 북양함대 전멸시킴

          ·청나라 북양함대제독 정여창 항복문서 서명후 자결 및 일본군의 산둥반도 장악

            →청일전쟁의 사실상 종결

  -3월 ·동학농민군 총대장 전봉준 사형선고(29일)

  -4월 ·일본승리로 청나라 이홍장과 일본 이토오 히로부미(이등박문) 간에 시모노세키(하관)조약  체결

         ·일본은 승전대가로 청나라 1년예산의 2.5배 배상금 보상받고, 요동반도, 대만, 펑후섬 할양받기로

          합의


        이처럼 1894년 당시 조선의 대내외 정국은 그야말로 백척간두에 서있었다. 고종과 민비일당은 외세에 의존하는 것 외에 아무런 힘이 없었다. 민비를 비롯한 그 척족들의 분탕질로 속절없이 나락에 빠져있었다. 당시 청나라는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서방세력의 침략으로 제 한 몸 가누기도 힘든 나라였다. 임오군란 때 한번 잘못된 파병 요청의 결과는 그 대가가 너무나 크고 가혹했다. 원세개가 임오군란으로 온 뒤 총리교섭통상대신으로 10여년(1885~1894) 동안이나 조선 조정을 경제적.외교적으로 좌지우지 휘둘러도 누구도 그를 제압하지 못했다. 고종 이하 모든 대신들이 속수무책으로 농락당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의 삶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참담했고 암울했다.


        당시 우리나라를 여행하며 현장을 목격했던 외국인이 있었다면 그는 우리를 어떻게 보고 기술했을까? 그가 봤던 모습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와 비교할 수 있는 책이 있다면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가슴 설레는 일인가?  오스트리아 출신 독일인 헤세 바르텍(1854~1918)이 쓴 <조선, 1894년 여름>주5이 바로 그 책이다.  그는 1894년 6월 말 일본을 거쳐 부산에 도착 후, 배를 타고 제물포로 온 뒤  한강을 따라 용산을 거쳐 한성에 입성했다.  조선을 떠난 날자는 명확지 않으나 1894년 8월에 있었던 청일간의  평양전투를 언급한 것으로 봐서는 최소한 3~4개월은 조선을 여행한 것 같다. 그는 국내에 거주하고 있던 선교사나 외교관 등과 사귀면서 그가 직접 보거나 들은 얘기들을 서술하고 있다. 그는 남유럽, 북아프리카, 캐나다, 미국, 멕시코, 중국, 일본, 태국, 인도 등 세계를 섭렵한 여행가이자 작가이기도 하였다.   


※ 이 글은  "조선, 1894년 여름과 2021년 한국(2)"로 계속됩니다.


주1. 전봉준과 갑오농민전쟁 우윤 저 P. 14  

주2. 전봉준과 갑오농민전쟁 우윤 저 P. 21

주3. 전봉준과 갑오농민전쟁 우윤 저 P. 83

주4. 한국문화대백과. 전봉준과 갑오농민전쟁 우윤 저외.

주5. 조선, 1894년 여름 헤세 바르텍 저  P.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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