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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의 따뜻한 날들

- 찬바람을 맞아도 따뜻해

by 해야블라썸 Oct 0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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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차:김녕해수욕장 ~ 석다원 ~ 성산일출봉


이른 아침, 난생처음 맛보는 날 것 그대로의 신선한 물고기 화롯 구이로 누린 호강. 단기간 고된 여행으로 지친 몸 뜻하지 않게 몸보신을 하게 된데 이어, 이 날은 가는 곳마다 우리를 반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브런치에 싸이월드의 기억을 옮기면서 그때 은혜를 입었던 장소들을 다시 한번 찾아보게 되는 데, 아직도 그 가게가 있을 때면 그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김녕해수욕장의 대성 횟집에 이어서, 석다원이라는 곳을 찾아보니 지금도 운영 중이다.


석다원 사장님께서 주신 얼음물을 들고서

요즘으로 치면 올레길 21코스에 해당되는 데 이 코스는 조금 한적한 곳이었다. 가게 앞을 지나치는 우리를 보시고 사장님께서 먼저 친절하게 말을 걸어오셨다. 가게 앞의 그늘마저도 도시에서는 인색하기 일쑤인 데, 석다원 사장님은 우리에게 그늘에서 좀 쉬어가라며 가게 자리를 내어주셨다. 사장님은 어디서 왔냐라는 근원적인 질문으로 시작해서 우리가 사는 고장의 산을 다녀 간 이야기며, 두런두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다시 떠날 채비를 하는 우리에게 500미리 얼음 생수물을 들려주셨다. 얼음물까지 챙겨주시는 사장님의 센스에 감격하여 함께 사진까지 찍으니, 싸이월드 기록에 의하면 사장님께서는 이 사진을 들고 신혼여행을 제주도로 오면 멋진 펜션 방을 공짜로 제공하시겠다고 했다. 나는 그 몇 년 새 이걸 잊고서 죄송스럽게도 해외로 신혼여행을 다녀와버렸지만...


공짜 아침밥에 공짜 얼음물. 해안가에서 걷고 걸어도 마주치는 마트나 카페가 없어, 바가지가 심한 휴양지를 찾았다면 족히 몇 천원은 할 수도 있었을 얼음물이 착한 주인을 만나 선한 사마리아인이 베푼 그 무엇으로 둔갑했다. 이 날의 행운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우리의 목표는 성산일출봉이었는 데, 거기까지 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 계획으로는 성산일출봉 코밑에서 민박을 하며, 다음날 일출을 보는 것이었다.


지도로 그 코스를 확인해 보니, 제주 공항에서 시작하여 최근 3일간 걸은 거리(제주공항~김녕해수욕장)와 맞먹는 거리(김녕해수욕장~ 성산일출봉) 임을 알 수 있다. 무슨 욕심에 이렇게 걸을 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날도 점심을 먹고 태연히 걷다가 저녁이 다가오자 어느새 자동 히치 하이커가 되어 있었다.


내가 엄지 손가락을 치켜든 건 아니지만, 외진 곳을 걷고 있는 두 여자를 어쩌다 보게 된 현지인들은 딸 같은 맘으로 걱정이 된 걸까?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특히, 이 날은 발의 상태가 엄청 심각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날 많이 걸어서였는 지, 도보 여행을 위해서 새로 샀던 신발이 발에 부담을 준 것인지 발등이며 발바닥이 성한 곳 없이 모두 까져서 오후가 끝나갈 무렵에는 둘 다 조금씩 다리를 절었던 것 같다. 이 모습을 목격한 1톤 파란 포터 아저씨는 두 여자에게 어디 가는 중이냐고 물으셨고, 그렇게 우리는 트럭 뒤에 가벼운 짐처럼 실린 채, 울퉁불퉁한 길을 지날 때마다 덜컹거리는 트럭에 엉덩방아를 찧음에도 신이 나서 마냥 행복한 채로 성산일출봉에 해지기 전 무사히 도착한 걸로 싸이월드에 기록되어 있다.


<찬바람 맞고도 신난 히치하이커>
...

더 신났던 것은 트럭 뒤의 바람의 세기를 체감하며
드디어 북제주에서 태평양에 더 가까운 남제주로의 경계를 넘었다는 거다.
아침부터 좋은 분들을 너무 많이 만나서
찬바람 맞아도 참으로 따뜻했던 날......
                                  <2005년 7월 25일, 싸이월드>


낯선 곳에서 맛본 새로운 맛의 따뜻한 밥. 한여름 그늘이 되어준 시원한 물. 아픈 발에 위로가 되어준 라이딩. 이보다 더 도보 여행자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여자 둘만의 여행자를 바라보는 이 시절 제주도의 시선은 뉴스 속만큼 거칠거나 잔인하거나 난폭하지 않고, 어린 시절 방석처럼 찾아들었던 아빠의 무릎팍 품속만큼 따뜻했다. 요즘은 여자 혼자 다니는 것이 범죄의 표적이 될 만큼 위험한 세상이 되어 다시는 여자로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젊은 이들을 마주하게 되는 건 몹시 안타까운 일이다.  


앞으로의 세상이 우리가 제주에서 경험한 것처럼, 모두가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되는 시선으로 우리 젊은 세대들을 따뜻하게 품을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우리의 행운이 여기서 끝나지 않고 상처 입은 발을 통해 또 다른 친절의 세계로 이어진 것은 안 비밀이다.


우리가 경험한 세상처럼, 우리 다음 세대들이 살 세상도 상처 입은 영혼들을 친절히 인도하여 편안한 쉼과 휴식을 주는 조금은 더 포근하고 따뜻한 세상이 되기를 이 순간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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