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여자가 섭지코지를 여행할 때만 해도, 그곳에는 요즘 관광명소인 한화 아쿠아플라넷이나 휘닉스 호텔 리조트는 없었다. 바닷가 언덕에는 당대 유명 드라마의 촬영지였던 성당만 오롯이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그 성당을 돋보이게 하던 주변 초원과 그 초원에서 여유롭게 풀을 뜯던 말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곳이긴 했지만...
지난밤 머물렀던 집에서도 아스라이 보였던 섭지코지는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걸어가던 두 여자에게는 아주 짧은 거리처럼 보였다. 네이버 길 찾기를 통해 검색해보니 그 거리는 2km 남짓 되는 데 말이다. 당연히, 두 여자는 걸어 다니는 도보여행자이니 걸어 올라갔다.
초록 목장을 따라 걷고 있으면, 사람들은 관광버스를 타거나 렌터카를 타고 섭지코지에 가뿐히 도착했다. 일반 관광객들이 타고 있는 버스가 지나갈 때마다, 흙길의 먼지가 펄펄 날렸다. 바닥에 풀들은 많은 데 나무는 없어서 뙤약볕에 걷는 게 조금은 힘들기도 했다. 버스가 지나갈 때는 줄지어 연속으로 지나가다가, 어느 순간은 지나가는 버스 없이 고요하니 파도소리만 크게 들리기도 했다.
그렇게 길을 따라 열심히 걷다가, 유유히 풀을 뜯고 있는 말이 보이면, 성산 일출봉에서 봤던 말이 떠올라 이제는 낯설지가 않았다. 제주도 왔으니 말이 풀 뜯고 있는 모습을 보는 건 당연한 듯했다. 두 여자가 얼마나 길을 잘못 든지도 모른 채... 드디어, 건물이 하나 보이고, 건물 쪽으로 들어가려 하니 직원이 놀란 듯했다.
(왼) 섭지코지에서 풀뜯고 있던 말, (오) 올인 성당을 뒤로 한 채 한 컷
두 여자가 도착한 건물은 섭지코지에 있는 드라마 "올인" 촬영지(한때 섭지코지의 명물이었던 이곳은 현재는 섭지코지에 다양한 관람 거리가 생겨 흉물로 전락한 한 듯하다.)로 유명한 성당이었다. 다들 문 앞에서 입장료를 내고 들어왔는데, 두 여자는 어쩌다 잘못 든 길로 해서 울타리도 없는 성당 뒤뜰(?) 쪽으로 자연스레 거기 도착해있었다. 다들 앞문으로 들어오는 데, 아무도 없는 뒤뜰 쪽에서 걸어들어오고 있었기에 우릴 발견한 직원은 어떻게 들어왔는지 의아해할 수 밖에 없었다.
직원의 질문에 적잖이 놀랐으면서도 남들이 걷지 않은 길을 걸었다는 생각에 얼굴에 묘한 미소가 지어지는 건 또 무슨 심보였을까? 마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를 쓴 로버트 프로스트라도 된 것처럼 느껴진 거였을까?
<The Road Not Taken> -Robert Frost <가지 않은 길> - 로버트 프로스트
TWO roads diverged in a yellow wood,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And sorry I could not travel both 몸이 하나니 두 길을 다 가 볼 수는 없어 And be one traveler, long I stood 나는 서운한 마음으로 한참 서서 And looked down one as far as I could 한 길이 덤불 사이로 굽어지는 곳까지 To where it bent in the undergrowth; 멀리, 저 멀리까지 내다보았습니다.
Then took the other, as just as fair, 그리고는 다른 길로 나아갔습니다. 똑같이 아름답지만
And having perhaps the better claim, 더 나은 길처럼 보였습니다.
Because it was grassy and wanted wear; 풀이 무성하고 닳지 않은 길이니까요. Though as for that the passing there 그 길도 걷다 보면
Had worn them really about the same, (다른 한쪽 길과)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And both that morning equally lay 두 길은 그날 아침 똑같이 놓여 있었습니다.
In leaves no step had trodden black. 서리 내린 낙엽 위에는 아무 발자국도 없이 Oh, I kept the first for another day! 아, 다른 길은 후일을 위해 남겨두었습니다! Yet knowing how way leads on to way, 길이란 길과 이어져 있다는 걸 알기에, I doubted if I should ever come back.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나는 한숨을 쉬며 말하겠죠. Somewhere ages and ages hence: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에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두 갈래 길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로 나아갔고,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그것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고.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길로 섭지코지에 이르는 길은 힘들었지만, 바다의 짙푸름과 하늘의 푸르름, 그와 어우러진 풀밭의 초록 빛깔이 나만의 색인 듯 소유할 수 있었던 빛의 촉감. 아무런 경계심 없이 유유히 풀을 뜯으며 바닷가 풍경을 갈무리하던 말의 풍경. 제주라면 응당 이런 풍경일 거라고 꿈꾸었던 풍경을 나만 바라볼 수 있었던 독점 뷰. 새로 나온 영화를 나 홀로 영화관을 대관하여 보고 있는 듯 상당히 마음이 부유해지는 경험이었다. 거센바람이 머리카락을 휘날려 내 뺨을 후려치는 것 같았어도 바람을 맞으며 걷는 일은 이 날따라 유독 상쾌한 일이었다. 그 길을 즐기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도달한 섭지코지의 '올인' 성당. 분명, 섭지코지로 가는 길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발길이 적게 닿은 제주도 해안 산책로를 걸은 그 기억은 거의 내 모든 생각을 바꾸지 않았을까?
방학이면 여기저기 해외여행을 다녀와서 기념품을 꺼내놓으며 내 방학은 이러했노라고 말하는 것이 젊은 날 내세울만한 그 무엇이었지만, 제주도 여행 이후로는 그런 허울뿐인 자랑은 사라졌다. 제주여행에서 얻었던 보여줄 수 없는 따뜻한 경험들이 여행 기념품이 된 채, 정말 중요한 것은 보여줄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기에 그 기념품을 간직한 채로 진중한 사람이 되었다. 여행 전의 나보다는 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내가 되었고, 나 밖에 몰랐던 여행자는 적어도 가족이나 주변인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으로 1cm 정도만큼은 더 성숙해졌을 테다. 우물 안에만 살아서 세상 이해가 부족했던 여행자는 그 우물 밖으로 나와서 진정 어른은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 씀씀이로 나이 먹는 것임을 알게 되며 세상에 대한 이해심을 키워나가는 사람이 되었다.
운 좋게도, 두 여자는 섭지코지의 다른 한 길도 그대로 남겨두지는 않았다. 내려오는 길에 오지 않았던 길로 내려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당에 가려서 잘 볼 수 없었던 섭지코지의 아름다움은 성당 따라 정식으로 난 길로 걸어 나오며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다. 언덕 위에는 왜적이 침입하면 봉화불을 피워서 마을에 위급함을 알렸다는 봉수대가 있는 걸로 보면, 그만큼 섭지코지는 주변보다 눈에 띄게 높은 지형이었다. 그래서인지, 바람도 세고, 거기서 바라보는 바다는 국내 여느 바다보다 파고가 높고 세서, 파도를 밀어 올리는 센 바람을 맞으니 걸어올 때의 뙤약볕은 금세 잊혀졌다. 절벽을 따라 둘러진 울타리에 기대어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여태껏 걸으면서 봤던 바다와는 다르게 조금은 무섭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시원한 바람의 매력에 마냥 기분이 좋았던... 센 언니가 무서우면서도 그녀의 당당함에 빠져들 듯, 섭지코지가 딱 그런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