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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들려주는 자장노래에

- 삶에 지친 여행자를 재운 건 바닷가 파도소리였다.

by 해야블라썸 Oct 0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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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차: 성산일출봉~ 우도~ 신양섭지코지 해수욕장


제주도 여행을 계획하면서, 꼭 해보고 싶었던 버킷리스트 중의 하나가 성산일출봉 해돋이를 보는 거였으니, 해가 일찍 뜨는 여름에 일출을 보는 일은 보통의 부지런함으로는 힘들었다. 새벽 6시가 되기도 훨씬 전에 해가 뜰 뿐만 아니라, 일출봉 정상까지 수백수천(?) 개의 계단(실제로 개수를 헤아려 보지도 않았고, 검색하여도 개수가 나오지 않지만, 오를 때의 고통으로는 수천 개, 아니 수만 개가 있는 듯했다.) 올라가는 데도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일출봉 바로 밑에서 민박을 구하더라도 최소 4시에는 출발해야 됐다.


도시에 있었다면, 해가 떠도 신경 쓰지 않고 잠이나 잤을 게으른 처녀가 제주도 여행을 가서는 어부의 부지런만큼은 아니어도 그 부지런을 조금은 닮아가려 애쓰는 처녀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해가 떠야 우리는 하루를 시작한다, 하루를 연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부들은 해가 뜨는 시간이 하루 일을 마감하는 시간이었으니, 해가 뜨면 끝이 나는 어선의 시간 개념을 알게 되고서는 태양이 세상을 비추는 시간 개념을 달리 보기 시작했다.


<2005, 7월. 그 해 여름, 성산일출봉에서><2005, 7월. 그 해 여름, 성산일출봉에서>
고행이라도 하듯 배낭을 메고 순례를 하는 우리는
아침 해를 경건한 맘으로 맞이했다...

여행하는 동안, 우린 농담처럼 우리 얼굴과 몸에 생긴 점과 기미를 가리키며
"얻은 게 너무 많아..."를 연방 외치며 다녔지만,
제주 태양 아래서 우리가 얻은 것은 분명 그뿐만은 아니었다.

해가 뜰 때 항구에 닻을 내리고 일과를 마치는 어부들...
그들에게 태양은 하루 일의 시작이 아니라 일의 끝이었고
태양이 비추는 세상을 바라보며
그들의 시간을 책임지고 즐기게 하는 또 다른 의미의 태양이었다.

어쩌면, 태양 아래 만물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을 여유롭고 감사한 맘으로
태양이 주는 시간과 태양이 비추는 세상을 책임감 있게 즐겨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린 해가 뜨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해서
태양이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시간의 의미를 잊어버린 채
태양이 비추는 세상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세상을 최대한 행복하게 즐길 책임감도 없이
해가 지면 하루를 마감하며
보이지 않는 캄캄한 세상 속에 자신을 묻고 숨기면서
오늘도 그럭저럭 잘 살았노라 위안하며
거꾸로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2005.07.27, 싸이월드의 기록 중에서>


발에는 상처가 여전했고, 새벽 4시 일찍 일어난 탓에 오전을 잠시 잠으로 보충한 우리는, 몇 일만에 보게 된 약국에 들렀다. 발에 연고 하나가 간절했다. 단순하게 발에 난 상처에 바를 연고를 찾는다는 말에 약사 분은 상처 치료에 좋은 연고를 하나 주셨다.


계산하고 약국을 나서려는 데, 우리의 걸음걸이에서 뭔가 이상함을 감지하신 약사분께서 부끄럽게도 우리의 발을 한번 보여달라고 하셨다.


물집이 터지고 까져서, 상처를 겨우 가린 양말을 벗는 것조차도 고역이었다. 가리워진 상처의 민낯이 공개되자 약사분은 깜짝 놀라시며, 어떻게 발에 이런 상처가 생겼냐고 물으셨다. 우리가 하고 있는 여행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자, 상처를 이해하시고는 다시 연고를 바꾸어 주셨다. 그리고, 오늘의 일정을 물으셨다. 우리는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약사님의 의중을 알지도 못한 채, 성산일출봉에 왔으니 여기서 가까운 우도를 가볼 계획이라며, 우도 가는 법부터 해서 이것저것을 물었다.


약사님은 우리의 하루 일정을 들으시며, 우도 가는 선착장이 여기서 가까운 것은 맞지만, 우리의 발상태로 걷기에는 힘들 거라고 생각하시는 듯했다. 또한, 우도에서 구경한다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상처 난 발로 걸어 다닐 모습을 상상하시며 걱정하셨으리라....


이래저래 자꾸 일정을 물으시더니, 차로는 가까운 거리니 약사님께서 직접 자가로 우리를 선착장까지 데려다주시겠다고 했다. 심지어, 선착장에 도착하는 시간에 연락하면 우릴 마중 나오시겠다고 했다. 우리는 데려다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서 그럴 염치까지는 사실 없어서, 웃음으로 대답을 회피했던 거 같다.


 하지만, 뻔한 일정에 대개 우도에 머무르는 시간은 일정해서 일까? 아님, 선착장까지 태워주시는 김에 배편을 끊어주셨나? 기억이 확실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우도를 여행하고 돌아온 선착장에 이미 우리를 마중 나와 계셨다는 거다.


더 놀라운 것은, 그분께 여기 가까운 곳에 별장같은 빈 집이 한 채 있다고 말씀하셨다. 가끔씩 들려서 쉬기도 하고 자신을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아 재워주는 용도로 사용하는 곳이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세컨드 하우스가 아니었을 까 싶다.


민박집에 비해 많이 갖추어진 것은 없지만 하룻밤 머무를 정도는 되니, 오늘 숙소를 정하지 않았으면 거기서 하룻밤 정도는 머물러도 된다고 하시며, 승낙하면 데려다주신다고 하셨다. 인생 좀 살아본 지금으로서는 그런 제안을 받았으면 우릴 걱정해서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인데도, 혹시나 나쁜 의도가 있지는 않을 까 의심하고 주저하며 진심으로 거절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그때는 그 제안이 반은 부담스러우면서도, 별장 같은 집은 대체 어떤 모습일지 철딱서니 없이 궁금도 하여, 염치없이 덜컥 수락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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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 별장같은 집 쫑문,   (중) 쫑문을 열면 나오는 해변가에 달 뜬 모습,  (오) 별장에 도착했을 당시 쫑문을 통해서 걸어 본 바닷가


도착해서 본 별장은 현무암 돌담의 옛스런 제주 집이었다. 마당에는 잔디도 깔려있고, 마당 한가운데는 바닷가 해수욕 풍경을 즐길 만한 커다란 나무 식탁도 있고, 야자수도 심겨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집은 신양 섭지코지 해수욕장 바로 앞이었다. 바닷가 쪽 담벼락의 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섭지코지랑 연결되어 개인적으로 소유하고픈 충동이 일렁이는 집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별장에서 여유로이 저녁달을 맞이하는 이 기분은,
더군다나 예기치 못한 낯선 이의 호의로 베풀어진 우리의 저녁 한 때와 하룻밤은
제주 여행에서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 되었다.
그간 힘든 도보 여행에도 불구하고,
낯선 곳에서 잠 못 이루는 나의 고약한 버릇 때문에 여윈잠 자던 편치 않던 잠자리가
이 날 밤은 자장가처럼 밤새 들려오던 파도소리로
제주 여행 중 처음으로 푹 잘 수 있는 날이었다.
...
      - <2005.07.28, 싸이월드의 기록 중에서>

       

요 며칠 계속된 제주인들의 친절 릴레이... 낯선 이에게 자기 밥을 내어주고, 자기 차를 태워주고, 쉴 자리와 방까지 내어주는 제주도 사람들은 대체 어느 별나라 사람들인가? 그들의 친절로 변화된 건 내 여행 속 새로운 경험의 횟수만이 아니라 세상에 차가웠던 내 안의 속 사람이었다.


늘 경쟁 속에서 내 것을 내어주기보다는 내 것을 먼저 챙겨야 했던 삶. 내가 가진 것을 보여주고 공유하기보다는 내가 가진 것을 없는 듯 숨기고 더 많은 것을 챙기려 했던 삶. 지지 않기 위해서는 따뜻한 마음이 아닌 차가운 머리로만 냉정히 승부해야만 했던 삶.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세상이기에 내쳐지지 않기 위해서, 달달한 그 무엇이 되기 위해서 아둥바둥 살아야 했던 삶. 그 어느 것 하나도 제주도에는 없는 삶 같았다. 낯선 이에게마저 선뜻 친절을 베풀 줄 아는 그들의 따뜻한 삶은 고단한 세상을 탓하며 단단히 비뚤어질 태세를 갖춘 서른 살 갓 넘긴 처자들에게는 상당히 낯선 풍경이었다. 


이혼을 할까 말까 고민하면서 걷기 시작한 여자도, 마음이란 게 그렇게 쉽게 변해서 헤어지기 십상이라면 결혼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걷기 시작한 여자도 모두 사랑을 비웃고 세상을 비웃었다. 세상에 뾰족하고 날카롭게 날을 세우고 차갑고도 냉정한 딱딱한 각을 세웠다. 하지만, 여행을 하면 할수록 뭐 때문에 세상에 그리 화가 났는지 점점 알 수가 없어졌고, 이해할 수 없던 그 사람을 조금씩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으며, 따뜻한 제주도 사람들 때문에 차갑기만 하던 마음들은 자꾸만 자꾸만 녹아 내렸다.(이 여행 후, 이혼을 고민하던 여자는 애 둘이나 놓고 여지껏 이혼 안 하고 잘 살고 있고, 비혼을 고민하던 여자는 그 다음해 12월에 결혼하여 애 둘 놓고 잘 살고 있다.) 


더욱이, 지치지 않고 끝없이 밀려왔다 밀려나가는 파도소리가 들리는 집. 그 집에서의 하룻밤은 그동안의 불면증을 달콤한 잠으로 바꾸어 주었다. 낯선 곳이 주는 불안감과 바뀐 잠자리의 불편함에 그간 잠들기 힘들었어도, 바다가 들려주는 자장노래가 있다면 다른 잠자리가 되었다. 밤새, 해변가를 걷고 있는 것처럼 크게 들리던 파도소리는 고단한 여행자에게 소음이 아닌 따뜻한 이불과도 같았다. 걷어차 버리고 싶은 성가신 그 무엇이 아닌 자꾸만 안 속 깊숙이 몸이 파묻히도록 쑤욱 들어가 덮고 싶은 이불.


그 이불이 너무 따뜻해서 돌고래라도 된 양, 바다를 꿈꾸며 잠이 들었다. 바다가 들려주는 자장노래에 섬집 아기가 잠이 들 듯, 쌔근쌔근 푸르르 깊은 숨소리를 내면서 낯선 이가 제공한 집에서 파도소리 투명한 따뜻한 이불을 덮고 세상에서 상처받았다고 화가 났던 두 영혼은 성났던 마음까지도 잠재우듯 푸르르 푸르르 깊은 숨소리를 내며 따뜻한 잠을 잤다. 꿈인 듯 꿈이 아닌 꿈같은 여행을 계속하는 꿈을 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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