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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여행 중 일탈 1 - 이중섭 미술관

- 잠자고 있는 연애 세포를 깨우고 싶다면...

by 해야블라썸 Oct 22. 2022

✔11일차 : 이중섭 미술관 + 서귀포 5일장


지금 돌이켜보면, 난 어릴 적에 조금은 맹랑한 꿈을 가진 소녀였다. 그 꿈이라는 게 유명한 예술가의 연인이 되는 것이었다. 지금은 기억도 안나는 작품들이지만 미술 시간에 배우게 되는 명화나 명곡들을 보면, 아니면 유명 시나 소설을 보면 유명한 예술가들이 연인에게 바치거나 혹은 그 연인에게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지는 작품들이 있었다. 그러면, 그 예술가만큼 그 연인은 어떤 사람이었을지 그것이 대단히 궁금해지곤 했다. 대체, 어떤 매력이 있길래 그렇게 위대한 작품을 만들게 했는지 어린 소녀의 마음에는 그런 것이 실로 궁금했다.


그래서, 허구가 가미된 줄 알면서도, 셰익스피어가 <로미오와 줄리엣>을 쓸 당시에 이런 사랑을 하지 않았을까 라며 추측하게 만드는 영화 <Shakespear in Love>나 베토벤이 사랑한 연인이 실제로 누구였을지 추리하는 <불멸의 연인> 같은 영화를 참으로 좋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정작 나는, 자기 마음을 시집 한 권으로 엮어내서 내게 고백하는 남자를 단박에 거절하기도 한 모순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대학교 같은 과 선배이면서 같은 모임 선배였던 그는 군대 가기 전에 내게 기다려 줄 수 있냐고 물었고, 군에 있는 동안에는 책 한 권 분량이 될 만큼 시를 써서 말년 휴가 때 그 시집을 내게 보냈다. 그 시집은 사랑 고백을 대신하는 거였지만, 그가 제대해서 돌아왔을 때 나는 결코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술하는 사람의 연인이 되고 싶은 게 꿈이었음에도 시모임에서 꽤나 인정받을 만큼 시를 잘 쓰던 그 선배의 마음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 고백 전의 다른 고백에도, 그 후의 다른 고백에도, 그렇게 어떤 고백도 받아들이지는 않으면서, 연애는 꿈꿨던 이상한 청춘이었다. 연애는 하지 않는, 연애세포는 완전히 죽어있는 상태였다.


이런 내게도 잠들어있던 연애 세포를 깨우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제주 여행 중 방문한 이중섭 미술관이었다. (올해 여름, 제주살이 하러 가는 지인이 혼자만의 시간에 할 만한 것 추천해 달라고 했을 때도 망설임 없이 추천한 것들 중의 하나가 이 미술관과 한라산 등반이었다.)  


우리에게 소를 그리는 민족 화가로 잘 알려진 이중섭 화백. 미술관에는 당연히 우리가 미술책에서나 봤던 붉은 소 그림이 걸려있었다. 그림 문외한인 내가 그냥 그림만 봤으면 그렇게 감흥이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미술관에는 나 같은 문외한도 그림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슨트들이 상시 대기 중이었고, 그림에 대한 설명도 설명이지만 다양한 형태의 미술 작품들과 미술 작품 외에 미술관의 뜰에서 보았던 화백이 쓴 시.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최애 장소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중섭 화백이 아내에게 쓴 애절함이 절절한 사랑의 편지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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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 이중섭 미술관 외형,      (중) 이중섭 자작시 시비,     (오) 유일하게 사진 촬영 가능한 소 그림(원본이 아닌 사본이라고 함)  


가족과 같이 살던 화백은 일본인 아내가 결핵과 영양실조, 아버지의 부고로 자식들을 데리고 어쩔 수 없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자 홀로 제주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함께 가고 싶었지만, 해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화백이 일본으로 들어가기는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겨우 일본으로 가게 된 화백은 일주일 정도만 머무를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을 뿐... 가족과 떨어지기 싫어서 불법체류를 고민하였을 정도라니... 장모는 혹여나 사위가 유명해질 경우, 불법체류가 문제가 될 수도 있다며 일단 돌아가서 제대로 된 여권을 들고 오라며 돌려보냈다. 그렇게 하여 이별 아닌 생이별을 하게 된 화백... 가족 서로 간에 주고받은 편지가 애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서로를 향한 사랑의 말들이 눈물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이중섭 화백 100주년 기념전에 일본인 아내가 쓴 편지가 도착해서 지금도 전시되고 있고, 또한 그 감동을 배가시켜준 아내는 101세로 최근에 별세했다고 알려진다.) 예술가의 서글픈 삶을 슬퍼하면서도, 그 사랑을 함께 버텨 준 그의 아내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남편과 함께 산 세월은 7년, 혼자 산 세월은 70년... 그럼에도 최근 별세할 때까지 살았던 주소지는 화백이 편지를 보냈던 시절의 주소지와 같았다고 한다.)


  예술은 무한한 애정의 표현이오. 참된 애정의 표현이오. 참된 애정에 충만함으로써 비로소 마음이 맑아지는 것이오. 마음의 거울이 맑아야 비로소 우주의 모든 것이 올바르게 마음에 비치는 것 아니겠소. 다른 사람은 무엇을 사랑해도 상관없소. 힘껏 사랑하고 한없이 사랑하면 되오...
                                                         
                                                              -이중섭 화백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일부 발췌-


떨어져 있는 가족에게 사랑을 표현할 방법이 예술밖에 없다니... 그림을 그릴 종이가 없어서 담뱃갑의 은박지까지 뜯어내어 그림을 그리곤 했다는 화백. 가족이 그리울 때마다 그림만 그렸으니 그 그림에는 다른 그 무엇은 담을 수 없지 않았을까? 그런 사랑 표현에는 어떤 가식도 담을 수가 없어 사랑하면 할수록 마음까지 맑아지게 되는 그런 사랑.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사랑하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이들의 사랑을 흉내 내지 않고, 오로지 작가만의 방식으로 힘껏 한없이 사랑을 표현했던 이중섭 화백. 그래서 그림이 아이처럼 해맑다. 천진난만하다. 따뜻하다. 애잔하다. 문득 별을 사랑했던 윤동주 시인의 순수함에 이중섭 화백의 순수함이 겹쳐져 오버랩된다.


눈물 제조기처럼 조금만 가슴 찡해도 이내 눈물을 흘리고야 마는 나는 그의 편지 때문에 주변 관람객들 몰래 눈물을 훔치며 작품을 감상하였던 걸로 기억된다. 편지를 세세하게 다 읽느라 어느새 도슨트의 해설은 놓치고 말았지만, 편지를 읽고 그림을 보니 그림들이 이해되는 듯했다. 편지와 그림 속 아내와 자녀들에 대한 그리움을 읽으니, 화백의 섶섬을 바라보는 눈길 속에 제주 바다의 윤슬이 담겨 가족의 그리움에 눈물 글썽였을 이중섭 화백의 모습이 내 눈에 아른거렸다. 이 그리움을 견디게 해 준 것이 한 여자와 자식에 대한 사랑이면서 곧 예술이었다.


이러한 그리움으로 나를 그리워해 줄 누군가가 없음이, 내가 그리워할 누군가가 없음이 못내 아쉽고, 마음 한켠이 시려왔다. 허전했다. 공허했다. 내가 그리워할 누군가가 필요함이 모락모락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내가 살 수 있는 날이 하루뿐이라 하더라도 내 마음 꽉 채우도록 간절히 그리워할 사람 한 명만 있으면 충분할 것 같았다. 그렇게 그다음 해에 이중섭 화백처럼 편지는 안 써 줬지만, 평일 매일 밤을 3~4시간의 전화통화로 내 청춘의 밤을 꽉 채워 주던 지금의 신랑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17년 전의 이야기이니 그때는 관람할 것이 그림과 편지, 그리고 미술관 밖의 그의 생가와 정원뿐이었는 데, 요즘은 미술관 규모도 더욱 커지고 그 주변 거리까지 더더욱 보고 체험할 것이 다양해진 듯하다. 제주 여행이 제주 풍경과 맛집 투어, 카페 투어, 박물관 투어 등 같은 레퍼토리로 뻔한 여행인 듯 조금은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이중섭 미술관을 방문하는 것은 어떨까 싶다. 분명, 식상(?)한 여행 중 일탈이 되리라 믿는다. 17년 전 같은 날 이중섭 미술관 외에도 서귀포 5일장을 돌아다니며 물건도 사고 이것저것 구경도 했지만, 17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미술관뿐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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