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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만난 나의 소울푸드

- 제주 방언 '모닥치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것

by 해야블라썸 Oct 17. 2022

✔10일차 : 공천포구  ~ 쇠소깍 ~ 서귀포시내


집을 떠나면 하루 이틀은 여행지 음식이 참 맛나지만, 사나흘 지나고 대엿새가 지나면 평범한 김치가 그립고, 간편하게 달걀 하나 툭 깨뜨려 끓여먹는 라면이 그리워지는 시점에 도달하게 된다. 특히, 해외여행이라면 김치와 라면이 그리운 시기가 더 앞당겨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국내 여행이면 어딜 가나 김치와 라면을 살 수 있으니, 크게 그리운 맛이 되리라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이 틈새를 비집고서 그리운 맛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떡볶이였다. 


흔히들, 스트레스를 받거나 부쩍 신경 쓸 일이 있거나, 혹은 독감이나 코로나처럼 독한 병을 앓으면 입맛을 잃고 살이 빠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나는 스트레스를 받아도, 신경 쓸 일이 많아져도, 독감에 걸리거나 코로나에 걸려도 입맛을 잃는 경우가 드물다. 마치, 나를 삼키려는 스트레스나 병 따위는 내가 다 먹어 해치울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오히려 더 먹기도 한다. 


최근 코로나로 심한 몸살을 앓고 격리 후 직장에 복귀했을 때도 살이 빠지기는커녕, 오히려 오동통한 얼굴로 웃으면서 나타나자 사람들은 내가 별로 안 아픈 채로 푹 쉬다 온 냥 생각하는 낌새도 살짝 포착되기도 했었다. 그래서, 격리 기간 잠시 일을 놓았던 것이 주변 사람들에게 덜 미안해지도록 어설프게 코로나에 걸려보니 그게 생각보다 무서운 병이더라고 변명 아닌 변명으로 너스레를 떨 수밖에 없었다. 그 모든 탓은 탄수화물을 사랑하는 내 죄일 뿐이기에...


이렇듯, 난 탄수화물을 즐겨먹는다. 어릴 적에는 채식주의자는 아닌데, 육류는 특유의 혀끝 감각으로 국산인지 외국산인지를 감별해내며 외국산인 경우에는 아예 씹어 삼키지도 못하고 뱉어 내는 경우가 허다했으며, 최근에는 그나마 좀 나아졌다는 게 불에 구운 육류 정도만 즐기는 편이다. 그러니, 물에 빠졌거나 물을 만난 고기는 아직도 소고기든 돼지고기든 잘 먹지를 못한다. 몸을 위해서는 단백질 섭취량을 좀 늘여야 함에도 탄수화물을 끊지 못하여 해마다 인생 최고의 몸무게를 갱신하고 있는 슬픈 실정이다.


여하튼, 이런저런 이유로 단백질은 잘 섭취하지 못하고, 탄수화물을 사랑한다. 그중에서도 단연 나의 최애는 매콤 달달한 떡볶이다. 요즘 국민 간식의 위상이 마라탕때문에 떡볶이가 한 단계 떨어진다고 하지만, 그래도 나에게 단연 최고는 떡볶이다. 작년에는 생기부(생활기록부) 작업으로 바빠지는 연말에도 크게 스트레스를 안 받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요즘 코로나 이후의 혜택이라 할 수 있는 다양한 밀키트 덕분이었다. 조금 유명해졌다 싶은 지역별 맛집 떡볶이들은 웬만하면 밀키트 형식으로 거진 만들어져 판매되는 듯했다. 거의 매일 저녁을 온라인으로 주문한 다양한 밀키트 떡볶이를 씹고 즐기는 맛에 하루의 피곤함을 떡볶이의 매운맛으로 개운하게 날려버렸다.


이렇게 내 영혼에 위로가 되던 떡볶이는 도보 여행의 피곤함이 쌓일수록 내가 찾고 그리워할 만한 맛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주시를 벗어난 시골 지역에서는 아무리 유명한 관광지라 하더라도 도시처럼 떡볶이를 파는 분식집은 잘 보이지 않았다. 이미 다리는 내 다리가 아닌 듯 내 의지가 아닌 습관으로 걷고 있었고, 습관에 이끌리어 피곤하나 쉴 겨를 없이 걷고 있던 나에게는 나를 토닥여 줄 소울푸드가 필요했지만,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그 무엇이었으니, 예전에 쓴 싸이월드의 글에서도 아래처럼 기록되어 있었다.   

의외로 번잡한 시내를 벗어나 한적한 시골에 이르면
매콤한 떡볶이 구경하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해외를 나가면 김치를 그리워하게 된다면 시골로 여행할 땐 늘 떡볶이가 그립다.
그래도 서귀포는 시단위인지라
역시 꿈에 그리던 떡볶이를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나오는 메뉴로 봐선 우리가 흔히 '모둠'이라고 하는 것,
(내가 사는 지역에선 그냥 "섞어" 주세요 이러는 것...)
아마 그거인 거 같다....
떡볶이, 오뎅, 김치전, 김밥, 만두를 섞어준다.
넘넘 맛있어서 일부러 여기까지 걸어와서 이틀 저녁을 이걸로 때웠다....ㅎㅎ

2005. 7월 마지막 날 - 내 싸이월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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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보여행 10일만에 제주공항의 정반대쪽 서귀포시로 들어서다.

도보여행 10일 차. 

드디어, 서귀포 시내에 들어서게 된 나는 이것저것 다른 것도 구경을 많이 했지만, 제주도 시장은 어떤지 궁금하여 시장을 들르기도 했던 것 같다. 이 시장을 둘러보던 중 가장 큰 소득은 내가 그토록 보고 싶고 먹고 싶었던, 먹는 그 자체만으로도 내게 위로가 될 수 있었던,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고, 먹으면 먹을수록 더 먹고 싶게 만들던 나의 소울푸드, 떡볶이를 발견한 것이었다. 메뉴명마저 제주방언이 맛깔스럽게 섞여 있어 더욱 제주스러웠던 이 떡볶이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여행 당시 분식집 앞 배너사진여행 당시 분식집 앞 배너사진

가게는 5평 남짓 되었을까? 현지인들은 가게 앞 가판의 떡볶이를 많이 포장해갔다. 가게 내부는 적은 평수라 편하게 앉을자리가 잘 없었지만 그 맛은 강력해서, 기다려서 먹는 다 해도 토, 일 주말 이틀간 저녁을 이 떡볶이 메뉴 하나 기다리는 것으로도 행복한 시간이 되었다. 육지의 떡볶이와는 살짝 다르게 만두, 오뎅은 물론이고 김밥과 김치전까지 가미된 이 메뉴는 당시 나에게 분식 최고봉이 되었다. 오뎅보다는 떡이 많은 걸 더 좋아하지만, 이렇게 한 데 섞여있는 것 또한 먹는 재미가 있었다. 한번 맛보고는 그 맛이 잊혀지지가 않아서, 이틀 째 밤에도 친구와 나는 누가 먼저 말 꺼낼 것도 없이 저녁 메뉴로는 상의하지 않고서도 고민 없이 모닥치기로 정해져 있었다. 주말에 여기 도착한 것이 얼마나 행운(일요일에는 앞으로 나아가는 도보여행을 하지 않고, 여행을 재정비하는 시간을 가졌었다.)처럼 느껴졌던지...   


서귀포의 기억은 구경할 거리가 많은 관광도시여서 이것저것 구경한 것들로도 기억이 남지만, 가장 감각적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결국 모닥치기 떡볶이다. 여행지에서 소울푸드를 만나다니... 마치, 내가 이 것을 먹기 위해서 여행을 시작한 것처럼, 서귀포에서의 목표지는 오로지 이 가게뿐이었던 것처럼, 다른 것을 더 구경할 것이 없대도 서귀포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들 그런 맛이었다. 




운 좋게도, 모닥치기 떡볶이집은 검색해보니, 아직도 운영되고 있다. 분식집 이름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서 알지 못했는 데, 네이버 지도 덕분에 기억을 더듬어 위치와 가게 오픈 연도를 검색해보니 일치하는 한 가게가 있다. "짱구 분식". 가게 내부 사진을 보니, 메뉴판 사이로 기억이 스멀스멀 떠오른다. 달큰한 떡볶이 양념에 절어서 약간은 눅눅하고, 신김치 맛도 살짝 나는 듯한 김밥에 오뎅, 만두, 그리고 김치전. 


스트레스가 내 키보다 커지는 계절이 온다면 제주 맛집 기행을 계획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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