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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도연 Mar 31. 2021

출근 대신 춘천

괜찮아, 기차가 나 대신 달려줄 테니까

백수의 월요일 아침, 무작정 춘천행 기차에 올랐다. 여느 직장인 출근길인 양, 뚜벅뚜벅 발길에 영혼을 맡겼다. 그래, 기차가 달리는 순간만큼은, 멈춰 버린 듯한 기분을 떨칠 수 있겠지. 그러니까 기차를 타는 건, 정체된 나를 잠시 잊는 ‘대리 경주’였던 셈이다. 어쩌면 운전대를 잡고 악셀을 밟거나, 걷거나 뛰는 건, 아니 누군가에게는 단지 숨 쉬는 것마저도, 자신이 멈추는 것에 대한 두려움일 때가 있지 않을까. 산다는 게 무언가를 좇을 때보다는 무언가로부터 쫓길 때가 많은 것처럼. 무튼, 달린다는 환각이 필요했다.
 
여행의 동행은 중요하다. 안군 결혼식이 있던 어느 여름 제주행 저가항공이 떠오른다. 전날 과음으로 괴로운 마당에 좁은 기내 공기는 시장통을 쑤셔 넣은 듯 푹푹 쪘고, 옆자리 거대한 사내의 거대한 뱃살이 꾸물꾸물 담을 넘었다. 다행히 이번 옆자리는 정갈한 아이보리 원피스 차림의 여성이었다. 그리고 선물로 받은 가쿠타 미쓰요의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가 말동무였다. 음식에 대한 과한 설명이나 강요가 없다. 어린 소녀의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음식에 관한 단상을 소곤소곤하면서도 생기 있게 읊었다.
    
춘천 온 김에 스무 살 군 입대 일주일 전 친구들과 왔던 '중도유원지'를 찾았다. 어쩜, 이제 중도에 걸어 들어갈 수 있다. 2015년 춘천대교가 생겼다. 친절한 세월이 추억까지 다리를 놓았구나 싶었다. 1km를 다 건너서야 이상하단 걸 깨달았다. '레고랜드' 조성과 북한강 살리기라는 아이러니컬한 조합의 명목으로 2012년 문을 닫았단다. 시위 현수막들을 보고 짐작했어야 하는데. 내가 알던 중도는 거기 없었다. 하긴 '생활의 발견'도 2002년 영화니까. 1km를 되돌아오며 시위에 동참하고 싶은 유혹이 따랐다.
    
걷느라 쏟은 칼로리를 '회영루'에서 주워 담기로 하고 명동까지 또 걸었다. 아아, 정기휴무. 만년짜장인데 만년 내내 먹을 순 없다니. 닭갈비 골목과 제일종합시장을 전전하다 1980년생 '함지' 레스토랑을 찾았다. 잘 만든 경양식은 유년의 추억으로 직행하는 황금열쇠다. 웨이터는 경솔하게 밥이냐 빵이냐 따위 묻지 않고 모두 내왔다. 물엿처럼 달달한 소스는 아쉬웠지만 전국 돈스 원정 때마다 늘 풀리지 않는 숙제다. 달달함과 시큼함 사이 어디쯤, 그리고 그 아래 살아 있는 진한 풍미를 찾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물론 아메리칸 소스에 대한 유년의 기억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때도 있다. 첫 담배인 1500원짜리 디스의 흔적이 지금의 취향에는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애초 기억 속의 소스 따위는 존재한 적 없는지도 모른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당장 타임머신을 타고 1990년 구 용산구청 대각선 맞은편 2층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레스토랑을 찾아 돈스 맛을 비교해 보는 것이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혹여 가능하더라도 추억을 현장 검증하는 일은 생각만큼 아름답지 않은 결론에 이를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달달한 소스였다고 밝혀진들 뭐가 달라질까. 열한 살 꼬마의 멱살을 잡고 '어째서 넌 이런 맛 따위에 진심인 거냐' 닦달할 수 있을까. '인터스텔라'처럼 과거의 나를 설득한대도 그때의 나는 지금 나와는 전혀 다른 취향이라 내가 과거로 갔을 뿐 과거의 나를 바꾸는 건 애초 불가능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런 논란을 제외하면 함지는 거의 완벽한 선물이었다. 한낮에도 추억을 강제 소환하는 고풍의 인테리어와 가전, 공 들인 스피커에서 흐르는 맘보 리듬에 맞춰 주방에선 젓가락 두드리는 소리가 경쾌했다.
    
여행은 때로 도피다. 지금의 현실을 잊기 위해 또 다른 현실을 찾지만, 여기도 현실 저기도 현실, 여기에도 저기에도 내가 있어서, 늘 실패할 수밖에 없는 도피다. 해서 여기든 저기든, 그저 살아 있는 지금 순간을 인정하고 즐기는 게 최선일 뿐이다. 함지의 창으로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다 정신 차리고 택시에 오르니 98.7 FM에서 백미현 신현대의 ‘난 바람 넌 눈물’이 흘렀다. '부르지도 마 나의 이름을, 이젠 정말 들리지 않아' 흘러간 세월이 내게 건네는 말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6시에 맞춰 도피에서 칼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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