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살 여름방학. 제주 사는 친구가 생애 처음 상경했다. 차비를 아낀다면서 인천까지 17시간 배를 탔다. 그는 하늘이 핑핑 돈다며 사흘간 속을 게워냈다. 멀미가 좀 그치나 싶더니 이젠 서울 공기가 너무 숨 막힌다고 하소연한다. 처음엔 당연히 하나의 은유나 농담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정말 밭은기침을 뱉기 시작했다. 하늘이 왜 이리 노랗느냐면서. 눈을 의심했다. 아니, 파란데. 미세먼지 얘기도 없던 시절이다. 그는 그렇게 일주일을 앓다 제주로 돌아갔다. 스무 살 즈음 연락이 끊어졌는데, 그가 다시 서울을 찾았을지 궁금하다. 트라우마였겠다. 괜히 미안하다.
제주는 지금도 그런 이미지다. 신생아 인큐베이터처럼, 순수를 지킨달까. 육지와 전혀 딴판이다. 미세먼지가 뭐야. 황사가 기웃대도 방파제를 차고 오르는 강한 바람에 튕겨 만주까지 던져질 것만 같다. 돈 걱정에 배 탈 필요도 없어졌고, 차표 한 장 끊는 기분으로 한 시간이면 닿는다.
이따금 포르투의 쨍한 하늘이 그리울 때면 이코노미석 장거리가 얼마나 힘든지 떠올린다. 17시간 배도 그랬을까. 나처럼 게으른 여행자들에게 제주는 선물이다. 특히 최근 제일의 미덕은 면세점. 위스키와 담뱃값이 아깝다면 동네 편의점 가는 수고에 좀 더 베팅해 당일치기 제주행이다.
그중에서도 제주시 연동은 더없이 게으름 부리기에 좋다. 공항에서 택시로 7분이면 도착한다. 일단 제주특별자치도청 소재지라 먹을 걱정, 놀 걱정은 따로 없다. 도청 맞은편 블록에는 도심에서 즐길 수 있는 대부분의 서비스, 호텔, 식당, 면세점, 마트, 극장, 편의시설, 주점이 몰려 있다.
그만큼 유동인구가 많지만, 지금은 코로나로 한산하다. 평소에도 롯데시티호텔 부근까지 내려가 숙소를 잡으면 조용하다. 이 부근 저렴한 '호텔레오'에 묵었는데 괜찮다. 다만 엘리베이터에서 24시간 흐르는 웅장한 진군나팔 같은 BGM을 계속 듣고 있자면 조금 어지러울 뿐.
이쪽의 최애 식당은 ‘모살물’이다.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모살물은 여전히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싸게 회를 낸다. 연동을 처음 알게 된 것도 이 집 덕분이다. 지난 여행길, 한밤에 택시를 잡아 타고 기사님 좋아하시는 횟집으로 데려가 주시라 부탁했더니 여기에 내려 줬다.
기사님은 제주 3차 산업 대부분 타 지역 사람들이 들어와 물가를 올려놓는다며 아쉬워했다. 모살물 가성비는 그야말로 미쳤다. 모둠회 소자 3만 원, 둘이 넉넉히 먹고도 남는다. 어떤 메뉴에도 고등어, 갈치회가 밑반찬으로 따라온다. 전공은 객주리(쥐치)다. 모살물 덕분에 일대가 대부분 객주리로 먹고 산다. 밥도둑 양념에 졸졸 조린 객주리는 입에 넣자마자 부드럽게 녹는다. 돔을 푹 우려낸 미역국은 자꾸 소주를 부르는 깊은 맛이다.
[모살물] 이래도 되나 싶은 가성비, 밥도둑 양념의 객주리 조림
해장은 몇 걸음 더 걸어 ‘삼무국수’로 가면 된다. 고기국수 한 그릇이면 굳이 비싼 돔베고기를 시키지 않아도 소주 세 병은 깔 만큼 든든하다. 면이 식도로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과음했다면 집에 가자 돼지국밥이나 순두부찌개다. 모살물, 삼무국수만 오가도 제주 육고기 물고기 마스터다.
호텔 쪽으로 몇 걸음 되돌아오면 ‘에이바우트커피’ 삼무공원점이 나온다. 현지 브랜드인데 지금껏 육지에서 이 정도로 시설이 뛰어나면서도 강력한 가성비를 갖춘 카페는 본 적이 없다. 오전 11시까지 샐러드, 샌드위치를 커피와 함께 시키면 3900원이다. 커피만은 1400원.
오후로 넘어가도 아메리카노 2900원, 디저트 포함 4900원이다. 모던한 인테리어에 전 좌석 콘센트를 갖추고 있다. 소파는 그대로 누워도 좋을 만큼 편한데, 실제 밤을 새웠는지 술을 자셨는지 룸 좌석에서 대자로 뻗어 꿀잠을 주무시는 아재도 볼 수 있었다. 무튼 서울 상륙이 시급하다.
[삼무국수] 고기국수 한 그릇이면 비싼 돔베고기 없어도 좋다
도청 쪽 블록은 또 다른 세상이다. 도청 뒤편에서 KBS 제주방송총국까지는 같은 연동이 맞나 싶을 정도로 고요하다. 키 낮은 주택만 듬성듬성 서있다. 한가롭게 산책을 즐기다 보면 모퉁이의 ‘민준이네’를 만난다. 아늑한 분위기의 가게 안에는 낮술 자신 아재 중 한 분이 상에 코를 박고 잠꼬대 중이었다.
두루치기가 나오기 전 밑반찬과 밥 한술을 뜨자마자 고개를 떨궜다. 할머니의 아득한 손맛이 떠올랐다. 푸짐한 찬만으로 몇 끼는 해결 하겠다. 콩나물, 파채, 김치와 달달 볶은 두루치기에서 유년시절 추억의 고추장 불고기가 생각났다. 연동에 산다면 아지트로 삼고 싶은 정겨운 곳이다.
[민준이네] 도청 쪽 고요한 블록 모퉁이에 숨은 아지트
제주 왔으니 바다를 보긴 봐야 한다면 차로 10분 거리에 '이호테우 해변'이 있다. 버스로도 30분이면 간다. 아담하니 짧게 산책하기에 좋다. 해변 길목은 아카시아 숲, 모래사장 뒤로는 소나무 숲이 펼쳐져 있다. 곳곳에선 모살치 낚시 삼매경. 말 등대는 일몰과 함께 담기 좋은 사진 명소다.
여행 내내 연동에만 짱박히려는데, 제주도민 안 군이 찾아왔다. 차로 30분 거리 동문시장 앞 ‘산지해장국’으로 끌었다. 인기 많은 집이라 또 20분 줄을 섰다. 게으른 여행자에게는 옳지 않은 동선이지만, 내장탕을 받고는 바로 무릎 꿇었다. 유명국 양평해장국 멱살 잡는다. 어깨가 한껏 오른 안 군은 과일가게에 들어서 젠체하듯 방언을 쏟아냈다. 덕분인지 싼 값의 레드향을 강릉 어머니께 부쳤다.
[산지해장국] 유명국 양평해장국 멱살 잡는다
[이호테우 해변]
안 군을 보내고 한참 제주항 부둣가를 서성였다. 제주의 미덕은 면세점이란 생각은 변함없다. 다만 거기서 사람과 음식은 살 수 없다. 무리에서 떨어진 왜가리와 잡담을 시도했지만 바닷바람과 파도 소리에 모두 묻혔다. 그렇게 제주는 사방을 틀어막고 맛을 지키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계획과 달리 너무 부지런히 다녔다. 다시 연동으로 돌아가 게으름 피울 차례다. 호텔레오 엘리베이터의 진군나팔 BGM을 거쳐 방에 들어서자 안도했다. 배달의민족으로 민준이네 두루치기를 주문하고, 아이패드 넷플릭스 창을 열었다. 그래, 이래야 게으른 제주 여행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