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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도연 Apr 11. 2021

용산역 광장의 600원

광장에 서면 선택지가 많아진다

방구석에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을 땐 전철을 타고 용산역으로 간다. 동네 카페도 좋지만, 때로는 광장이 주는 거대한 환상이 필요하다. 여기선 전철, KTX, 아이파크몰, 전자상가, 오피스 숲이 맞닿아 있고, 조금 더 걸으면 골목골목 숨은 노포의 추억들을 만날 수 있다.

유년 시절, 허름했던 개발 이전의 거리를 쏘다니던 기억도 곳곳에 묻어난다. 초년의 첫 월급으로 나에게 선물했던 건 전자상가에서 산 일제 산요 전기면도기였다. (군대 선임들이 부러웠다) 어디로든 갈 수 있겠구나, 두근두근, 광장은 멈춰 있던 뇌를 심폐 소생한다, 두근두근.

전철에서 내리면 역사 옆 리빙파크 3층 테르미니에서 아메리카노를 받아 든다. 역사 카페보다 저렴하면서도 가깝다. 우선 산뜻하게 머리를 환기할 수 있는 곳은 영풍문고다. 월요일 오전 영풍문고는 그야말로 개인 서재다. 직장인들은 사무실에 몸을 저당 잡히고 자영업자도 주말의 노고를 치하하는 시간.

임지은 ‘연중무휴의 사랑’ 커버가 눈에 띈다. 무심히 기지개 켜는 여성은 너도 한숨 돌려 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솔직한 시선과 문장이 매력적이다. 여성 틈에서도 여성이 숨쉬기 힘든 처지, 거기서 치미는 자신의 분노도 때론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고백이 신선하다. 다음에 또 만나 끝까지 읽고 싶다.

용산의 백미는 KTX 역사. 여긴 거대한 메뉴판이다. 전철로 기차, 어디든 골라 떠날 수 있. 캐리어를 끄는 행인들을 보는 것만으로 ‘대리 여행’이다. 오는 걸까, 가는 걸까. TMO를 통해 자대 복귀하는 A급 칼 군복 차림의 장병들, 주말이 지나 기숙사로 돌아가는 대학생 무리도 보인다.

벽에는 전국 지자체의 호객 광고가 도열했다. 강원도는 곰취, 참취, 곤드레, 어수리 등 산채 나물밥을 ‘먹구 보구 맛있는 기차여행’을 오시란다. 유네스코 세계유산도시 익산은 백제왕도가 얼굴이다. 아니, 논산도 세계문화유산도시였다. ‘돈암서원에서 사람 꽃이 핀다’고. 훈련소 장병들의 민머리와 설움만 피는 게 아니구나. 보성은 녹차수도다. ‘우리집 안심식탁 보성몰’에서 보성녹차, 벌교꼬막, 보성키위를 판다고 알렸다.

‘강진맛 愛 흔들’리는 강진군, ‘콩닥콩닥 설렘’ 화순, ‘낮과 밤이 빛나는’ 광양, ‘다시 생각나’는 전라북도, 무안에는 황토갯벌랜드가 있고, 영암군은 ‘氣의 고장’이다. 해남은 호기롭게 ‘여행, 시작, 땅끝’이란 세 단어만 강렬한 2만 포인트쯤 크기로 박아 놨다. 광주여대는 전국 여대 취업률 1위란다. 그러고 보니 전라도 광고가 대부분이다. 관광이 아니면 좀처럼 어깨 펴기 힘든 문화유산들은 코로나의 직격탄을 맞고 있을 것이었다.

이런 현실 반영일까. 듬성듬성 빈 광고판넬 옆으로 ‘MG와 만나면 당신이 주인공’이라고 영탁이 외친다. 형이 왜 거기서 나와. 신혜선도 ‘MG가 찐’이라며 거든다. 대출 광고가 즐비하다. 아이유는 ‘성실납세로 방긋’이라는데, 납세 말고 아이유 때문에 잠시 방긋.

담배를 물러 역 앞 광장으로 간다. 월요일 오전이라 좀 한산하다. 붉은 베레를 쓴 군인이 허리를 꼿꼿이 펴고 세련된 각으로 담배를 물고 있다. 그를 향해 60대 정도로 보이는 아저씨가 한껏 미소 띤 얼굴로 다가간다. "자네는 어디 근무하나." "네 26사단입니다." "내가 거기 연대 보좌관으로 있었네 껄껄." 보직은 지, 어디 힘든 데는 없는지, 둘은 한참을 신나게 대화했다. 처음 보는 아저씨에게 꼬박, 반듯하게 대답하는 청년은 실은 귀찮았을까, 아니면 쓸쓸한 자대 복귀 길에 반가웠을까.

옆에 군대에 빗대 일 얘기하는 직장인들이다. "일은 빡센데 다니는 건 헐렁해." "최전방 같은 거구나." 그밖에 주식이 어떻고 채권이 어떻고, 알아들을 수 없는 돈 얘기가 오갔다. 그런데 그 옆으로 햇살에 반짝이는 500원짜리, 100원짜리 동전 하나씩이 눈에 들어왔다. 600원.

주울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보는 눈도 많고, 주인이 있을지도, 더 필요한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 의한 일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데 멀쩡히 자태를 뽐내고 있는 동전이라니. 자리를 깔고 쉬다가 담배를 빌리는 노숙자들도 상 머무는 곳이다.  


문득 염창동 피아노 학원 의자 커버에 깔린 동전들을 발견하고는 쿵쾅쿵쾅 뛰던 여섯 살 꼬마의 심장이 떠오른다. 연습실 문틈으로 아무도 오지 않는  조심스럽게 확인한 후 황급히 동전을 주머니에 쓸어 넣었다. 하드를 빨고 회전목마를 세 번 탈 수 있는 돈이었다.


 가는 길 시장 채소장수 아줌마가 말을 걸어왔다. "아이고, 아가 맛난 거 나." 그제야 하드를 빤 입술이 시뻘겋게 물든 걸 깨달았다. 동전을 들키기라도 한 듯 얼굴이 화끈 달았다. "아뇨 이건, 이건 피가 나서 그런 거예요." 아무렇게나 얼버무린 채 서둘러 시장 길을 달려 나왔다.


도시가스공사 앞 주택 단지가 시야에 들어오자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거기서 오늘도 붉은 베레를 쓴 할아버지가 회전목마를 돌리고 있었다. 회전목마를 구경하러 줄 선 동네 아이들이 와글와글했다. 호기롭게 동전을 내미는 나를 향해 할아버지는 붉은 베레를 들어 올려 보였다.


날을 기억하는 건 동전 때문만은 아니다. 목마를 타고 둥실 허공에 오르던 그때, 얼마 전 유치원에 새로 오신 예쁜 여선생님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몸이 뻣뻣해졌다. 매일 다니던 동네 거리가 낯설어졌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말을 걸다. 문득 멈추지 않는 회전목마가 원망스러다. 제는 동전 주운 게 낭패 같았다. 시 후 목마에서 내려 아이들 곁의 선생님을 빤히 봤다. 선생님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른침이 목에 걸다. 선생님이 다가오자 머리가 몽롱했다. 드디어 선생님이 내게도 말을 건넸다. "이름이 뭐니?"


그제야 젖힌 목에서 꼴깍 소리가 들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잔잔하고 부드러웠다. 마스카라가 덮은 깊은 눈을 끔벅이며 쪽을 살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대답할 수 없었다. 그건 선생님 목소리나 옷차림 때문이 아니다. 그저 질문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번 더 마른침을 삼키고 나서야 그녀가 나를 알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선생님은 우리 유치원 이름이 힌 전단지를 내밀고 있었다.


낯선 풍경들이 다시 본연의 색을 다. 당시 우리의 침묵 앞에 멈춰 선 파란 트럭을 기억한다. 낯익은 피아노와 이삿짐이 잔뜩 실려 있었다. 아버지 회사 화물트럭이다. "잘 만났네. 어서 타." 아버지는 선생님은 쳐다보지도 않고 나를 무릎에 앉혔다. 나와 상관없는 동네 잡상인 정도로 여겼겠다. 선생님이 점점 멀어졌다.


나와 상관없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트럭이 향한 곳은 공장 부지였다. 공원들 휴게실로 작은  이제 우리 집이 됐다. 주택과 회전목마의 거리는 더 이상 우리 동네가 아니었다.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눈을 끔벅이는 선생님, 그녀가 멀어지는 건 어쩌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혹시 동전을 줍지 않았다면 그날 풍경 달을까. 광장의 동전은 의 허기를 달랠지, 어떤 사연이 담길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담배 세 대를 다 태우고 나서도 600원은 거기 그대로 있었다. 흡연구역을 떠나며 행인들을 한 번 둘러봤다. 아는 걸까, 모르는 걸까. 골방에서 광장으로 나오니 선택지가 많아진다.


 600원은 누가 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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