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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도연 Apr 05. 2021

여의도에서 가장 빠른 패스트푸드

돈 없으면 집에 가고 시간이 없으면 '진주집'으로 가라

평일 낮 여의도는 유난히 뜨겁다. 초 단위, 틱 단위로 주가가 널뛰고, 큐시트에 맞춰 방송과 국회가 춤춘다. 한시라도 타이밍을 못 맞추면 수 조를 날릴 수도 있는 판이 여기다. 시간에 쫓기는 허기를 달래자면 식당들도 분주하다. 개중에서도 가장 빠른 식당은 어딜까. 맥도널드, 타코벨, 판다도 아니다. 구 여의도백화점(현 맨하탄빌딩) 지하의 오래된 국숫집이다. 돈 없으면 집에 가고 시간이 없으면 '진주집'으로 가야 된다.

조금 과장하면 진주집에선 앉자마자 음식이 나온다. 콩국수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종업원은 주방을 향한다. 상에 젓가락을 깔고 스뎅 양푼에 물을 따라 목을 축이고 있자면, 내려놓는 양푼과 경쟁하듯 국수 사발이 달려온다. 세이프냐 아웃이냐. 판정에 앞서 강렬한 빨간 보쌈김치가 시선을 뺏는다. 색감만큼 제법 센 맛이다. 매콤달큰하면서 아삭한 식감은 등촌 최월선칼국수나 김포 공항칼국수의 그것을 떠올리게 한다.

반면 콩국수는 한없이 매끈하다. 크림스프 같은 은은한 비주얼은 잠시 욕망을 쉬어 가라고 말하는  보다. 만화 주인공 귓가에서 다투는 천사와 악마처럼, 한쪽에선 갈길이 멀다 재촉하고, 다른 쪽에선 조금 천천히 걷자고 말리는 기분. 정갈한 면과 고운 콩국을 함부로 뒤섞는 게 잠시 망설여진다. 하지만 갈등은 오래 남지 않는다. 혀에 닿고 나면 흔적마저 휘발된다. 찰랑이던 중면은 콩국과 구분하기 힘들 만큼 부드럽게 식도로 미끄러진다. 곧 사발째 후루룩 마시는, 아니 이미 빈 사발과 손도 대지 않은 김치 앞에서 머쓱한 자신을 본다. 지금 내가 뭘 먹은 거지. 식당에 들어서 식사를 마칠 때까지 채 5분이 걸리지 않는 때도 있다.

후회한다. 여의도에서 초년 시절을 보낼 땐 왜 비빔국수만 시켰을까. 하긴 그런 시절이었으니까. 한 주를 꾸역꾸역 버티다 금요일 저녁이면 고추장과 참기름만 묻힌 소면을 양푼에 담아 목구멍에 차오를 때까지 삼키고는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침대에 몸을 던져 토요일 저녁 즈음 눈 떴다. 일요일이면 허기를 채우고 다시 잠들거나 밀린 원고를 쓰러 사무실로 기어 나갔다. 다시 한 주가 시작되고 또 꾸역꾸역 일주일을 삼켰다. 전경련회관에서 홀로 밤새우는 건 일상이어서 새벽 순찰을 도는 빌딩 보안요원들은 14층에선 으레 내 이름을 불러 생사를 확인하고 떠났다. 회사의 압박이 있는 것도, 꿈과 희망이 가득한 파란 꿈이 기다렸던 것도 아니다. 그저 쪽 팔리지 말아야지, 인터뷰이에게는 쪽 팔리지 않는 기사를 써줘야지, 따위 생각이 전부였다. 잘들 보지도 않는 잡지의 잘 보이지도 않는 바이라인 하나에 꾸역꾸역 나를 갈아 넣었다. 금요일이 돌아오면 다시 국수를 비볐다. 비빔국수는 일주일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제의였고, 거의 유일한 휴식이었다.

사발 바닥에 초년의 바닥이 맴돈다. 당시 비빔국수가 현실을 잊게 해주는 독한 마취제였다면, 지금의 콩국수는 어쩐지 아직 닿지 못한 미지의 세계가 여전히 우릴 기다리고 있다는 전언으로 몸 구석구석을 일깨우는 기분이다. 시간이 한참 흘러서야 보이는 것도 있게 마련이다. 바닥, 더 잃을 게 없는 순간. 바닥, 하지만 때로 새로운 시작일 수도 있는 순간. 바닥, 시작이든 끝이든, 파란 꿈이 있든 없든, 또 발을 붙이고 서야만 살 수 있는 자리. 그래, 여기가 끝이 아니다. 곧 다른 게임이 시작될지도 모르는 거다 그래서.

콩국수 한 그릇을 더 주문한다. 지난 세월은 묻고 더블로 새 판을 짜는 느낌으로. 물론 이렇게 대책 없이 발주 넣다가는 금세 지갑이 털리고 만다. 추억을 소환하는 것도, 잔고를 거덜내는 것도 가장 빠른 패스트푸드점이다. 그럼 애초 뜨거운 닭칼국수를 시키거나 지인과 함께 와 속이 꽉 찬 접시만두를 찬으로 두는 것도 좋겠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고 했다. 보쌈김치와 더 어울리는 메뉴도 그쪽이다. 잘하면 지인이 계산까지 해 줄지도. 그렇게 다시 조금씩 바닥을 채워 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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