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분 상태 속에서 우리 자신을 잊어버리면, 그 때 가장 깊은 비애 속에 빠지고 만다는 사실. 내면 안에 머물기, 조용히 있기, 혼자 있기, 오히려 그때 슬픔은 덜 고통스러워진다.’
「롤랑 바르트」‘애도일기’ 중.
이곳은 빗방울이 억수처럼 쏟아집니다. 침묵을 지키던 검은 하늘은 한 방울, 또 한 방울 빗방울을 토해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땅 위로 눈물길을 만들어버리고 있습니다. 청개구리들의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던 호수에는 모든 소리가 소실된 채, 빗방울들의 마찰 소리만이 거세게 누웠습니다. 거센 빗방울에 꽃들은 쓰러지고, 나무들은 기울어 가는군요. 몸서리치도록 처절한 슬픔은 표현할 길이 없는 침묵이 되어 봇물처럼 터져버린 눈물이 되어가나 봅니다. 격렬한 슬픔이 소실점이 되어 빗방울에 쓸려 내려갈 때까지, 속수무책으로 저를 밀어 넣습니다.
울 수 있는 사람은 아름다우니까요.
한바탕 쏟아내고 나면 조금 나아질까요. 슬픔이 빗방울이 되어 바닥에서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습니다. 통점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몰라 더듬거렸는데, 이젠 괜찮을 수 있을 거라 믿어왔는데, 얼마 전 그 지점을 화살이 과녁을 뚫어버리듯 정확하게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치유되지 않는 애틋함과 무력함이 운명을 향한 분노로 변신하는 순간이었지요. 빗방울은 언제쯤 고요한 진공 상태로 사라질까요. 아니, 사라지기나 할까요.
‘롤랑 바르트’의 말처럼, 소란스러운 군중 속에서 허우적거리기보다는 고독과 고뇌가 자리한 고요한 심연이 보송한 이불처럼 평온하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관심 없을 격정의 페르소나를 따라 빗방울이 산허리를 집어삼키며 흘러내립니다. 심장이 무너져 내릴듯한 폭우가 다가오는걸, 우두커니 서서 가만히 바라봅니다. 무기력함이 땅으로 뿌리를 내리는 것만 같습니다. 계절과 계절의 사이에서 여린 것들이 처절하게 흔들리기에 끈으로 묶어줍니다.
악착같이 매달려보지만, 흩날리는 그 마음을 어찌할 수 없어서 우리는 지금도 입을 벌리고, 울먹이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슬픔의 손길을 완강하게 뿌리칠수록, 사라지지 않는 슬픔은 더욱 선명하게 존재하려 악다구니를 쓰는 것만 같습니다. 차라리 슬픔을 존중하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게 나을까요. 그렇다고 불행한 건 아니니 말입니다. 어느 날 친구가 저에게 삶을 가볍게 살아보라 얘기하더군요. 하지만 가벼워지려 할 수록 존재는 참으로 흐릿해져만 가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유쾌한 언어들과 즐겁지 않은 농담, 자아를 의식한 대화와 알맹이 없는 말들, 삶에 대한 성찰과 망각하는 삶. 이들의 사이에 서서 무엇이 가벼운 건지, 오가는 저울의 바늘을 여전히 저는 가늠하지 못하겠습니다. 깊이가 있기에 가볍지 않을 수 있고, 무게가 있기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잊어버리려 애쓸수록 죄책감과 비겁함, 그리고 지워내지 못하는 자기 폄하의 늪은 빨간 눈을 부릅뜨고서 숨 막힐 듯한 중력으로 저를 하염없이 끌어당깁니다. 세탁기를 몇 번이나 돌려보아도 얼룩진 슬픔은 지워지지 않고, 그늘진 존재만이 낡아지고, 해지기만 하는 듯합니다. 친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살아있음을, 그리고 살아있었음을 명징하게 말해 주는 기억들과 문장들로 저는 차라리 무거워지고, 침잠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슬픔은 살아가는 데 있어 부인할 수 없는 삶의 질료 중 하나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슬픔이 있기에 우리는 기쁨을 알아볼 수 있겠지요. 다가올 기쁨을 위해 기꺼이 온전한 슬픔이 되어 저는 추락하겠습니다. 빗방울에 흔들리는 카모마일이 안쓰러워 꽃을 따며 생각에 잠깁니다. 외롭거나, 힘들다는 감정에 불행이 포섭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극도의 짙은 습이 가득한 이곳에서 카모마일의 건강한 향기는 더욱 진하게 번져가는군요.
꽃들은 가득한 빗방울 속에서 눈물을 떨구지만, 끝내 행복하고야 맙니다.
빗방울이 멈추어 갈 무렵, 사랑하는 친구가 딸기를 따겠다며 달려와 주었습니다. 딸기 때문인지, 저에게서 피어나는 슬픔의 기척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달려와 준 친구가 한없이 고맙기만 합니다. 빗물에 상처 입은 딸기를 어떻게 해야 하나 함께 갸우뚱거리다가 딸기잼을 만들기로 결정했어요. 물러진 딸기를 깨끗이 씻어 설탕과 레몬즙을 넣고 한참을 뭉근하게 끓이다가 찬물에 한 숟가락 떨구어 보았습니다. 찬물에도 희석되지 않는 묽기가 되었을 때, 소독한 병으로 옮겨 담았지요. 상처 입은 딸기의 향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친구는 눈썹달이 된 눈을 하고서는 환하게 웃더군요. 슬픔을 눈물로 끓이고 또 끓여내니, 존재는 선명해져만 가는군요. 무엇에도 희석되지 않는 슬픔의 향이 가장 아름다울 수도 있음을 생각합니다.
그래요. 지금 저는 묽었던 딸기처럼 행복합니다. 행복하고 말구요. 아이가 응석을 부리듯이 불현듯 날아드는 슬픔을 완강하게 거부하다가 슬픔에 취해 가끔 노래를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슬픔을 맴도는 건, 슬픔도 지나고 나면, 먹구름 사이에서 번져가는 햇발 같은 추억으로 내릴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슴 주저앉는 나날들에 끊임없이 흔들리지만, 그렇게 흔들리며, 다시 태어나 농밀한 향기와 문장을 만들어 가는 게 글쟁이의 소명이 아닐까요. ‘폴 발레리’의 말처럼 신은 인간에게 고독을 무한히 감당하는 능력을 넣어 주셨나 봅니다. 눈물로 만든 딸기잼에 빵을 적셔 먹어봅니다. 저와 친구 사이를 흐르던 무겁던 중력은 어느새 줄어들고, 달콤한 공기만이 은은하게 채워지는군요.
비가 그친 후, 친구와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커피를 들고서 평상에 앉아 호수를 바라봅니다. 희뿌연 해무 사이에서 간간이 보이는 육지를 보듯, 호수의 크기가 흐릿해집니다. 젖어 있는 것들에게선 슬픔이 비칩니다. 슬픔에 스스로가 잠식되어 버리면, 자신을 향한 분노가 농도 짙은 안개처럼 넘쳐흐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굳어버린 분노는 손 쓸 틈 없이 자신을 집어삼키며, 안개처럼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희멀건 우울로 번져가겠지요. 우울이 깊어지고, 번져갈수록 더듬거릴 힘조차도 남아있지 않은 무기력함에 빠져들어, 끝내 삶을 가벼이 여겨 버리는 게 아닐까요.
슬픔이 분노와 우울로 전이되기 전에 저는 친구를 만났고, 맛있는 밥을 먹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건 아니잖아. 사람은 모두 다르니, 그저 다른 것뿐이라고 생각해.’
‘글을 쓰면서도 아직 내가 많이 부족해서 그래... 그래도 네 덕분에 내가 웃는다.’
‘기분도 꿀꿀한데 우리 비빔국수나 해먹자.’
빗물 가득 고인 텃밭에서 케일과 상추, 쑥갓과 깻잎을 툭툭 잘라옵니다. 잘라 온 야채들에 잔뜩 매달려 있는 흙탕물을 깨끗이 씻어내고, 고추가루와 고추장, 국간장과 다진 마늘, 매실청과 식초를 넣은 양념장에 삶은 면과 함께 무칩니다. 매콤달콤한 향이 슬픔을 경쾌하고도 맛깔나게 버무려 주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요. 우리는 너무나 슬프고, 아파서 눈물을 뿌리며 빗방울을 맞으며 뛰어다닐지라도 언제 그랬냐는 듯, 억척스럽게 먹고, 소란스럽게 농담하며, 크게 웃어버릴 줄 아는 일을 지루하리만큼 해내야만 하는 존재들입니다. 눈물을 거두고 방문을 열고서 나올 우리를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아무 말 없이 밥 먹으라며 밥상을 차려두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저녁 산책길에 호수의 물결을 따라 달빛이 고요하게 스며드는 걸 보니, 내일은 햇살이 황홀하게 자리를 바꿔 앉을 듯합니다. 호수의 자욱하던 안개 속 어느 언저리로 매번 격렬하게 도망치고 싶었지만, 어쨌든 도망가지 않고, 지금껏 살아오고 있습니다. 두렵지만, 순간순간 결정하면서. 슬픔에 온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일은 살아가는 일에 있어 고귀한 영역이라 여전히 믿습니다. 인간이 성숙해지는 데에 얼마나 많은 눈물이 필요한 걸까요.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조금 알게 된 게 있다면, 슬픔도 온몸으로 살아내야 할 제 삶의 일부라는 것을. 슬픔은 중요한 감정이며,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질문입니다. 언제나 슬픔은 저에게 물어오는 것만 같습니다.
‘너, 지금 잘 살아가고 있니?’
질문에 대한 대답을 생각하다 보면 조금은 더 나아간 듯합니다. 슬픔이 지나가고 나면, 잎사귀에 발린 먼지들이 빗방울에 쓸려 내려간 듯, 저의 삶이 선명하게 닦인 것도 같습니다. 마치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비 내린 뒤의 찬란한 저 하늘처럼 말입니다. 지금 제가 가장 두려운 건, 슬픔이 고갈되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슬픔이 없다면 기쁨을 알아보지 못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