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그녀가 내게 그 모든 이야기를 하는 것. 얼마만큼이나 그녀를 좋게 만드는지를 느끼면서 난 어떤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내 주위의 그 누구에게도 잘해 줄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고통스러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뮈리엘 바르베리」‘고슴도치의 우아함’ 중.
이른 새벽 파르스름한 빛에 눈을 깜빡이며 커튼을 열어젖히니, 보송한 안개들이 서재에 누웠습니다. 하얀 솜 뭉치들이 펼쳐놓은 세상 속에서 나무 뒤에 숨어 우는 산새 소리를 듣고 있으니, 참으로 호사스러우면서도 영롱합니다. 며칠 간의 비와 자리를 바꿔 앉은 찬연한 하늘 아래에서 찾아오는 온화한 적요는 그늘진 외로움의 표정과는 명도가 완연하게 다릅니다. 하얀 김이 실처럼 피어나는 까만 커피 한잔을 들고서 평상에 앉아 버릇처럼 잠시 생각에 잠깁니다. 저에게 주어진 오늘 하루와 한 주, 남아있는 한 달과 한 해. 달려올 불확실한 세월들. 살아내는 일이 가끔은 버겁고 두렵기도 해서 조금 울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살아가는 일은 좋은 일인 듯합니다. 꿈을 향해 걸어가는 길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인연들과 뜻밖의 결실들이 참으로 감사한 요즘입니다. 자연 안에서 선택한 자발적 고립과 문장이 된 침묵들을 떠올려보니 그 안에는 잔잔한 설렘도 있었고, 소소한 기쁨들도 담긴 저만의 일상이 있더군요. 인연은 그렇게 하나하나 때가 되면 건너오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가끔은 외로움의 통점이 수시로 붉어지며 수포처럼 부풀어 오르는 건, 아마도 인간이 숙명처럼 갖고서 태어난 원초적인 슬픔과 따듯한 사람의 살갗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혹독한 외로움 때문에 사람들은 잘못된 결정을 하기도 하고, 숨죽여 울기도 하며, 좋지 않은 인연을 맺기도 합니다.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 외로움은 신의 의지일까요.
심장이 다시 아려옵니다. 움직여야겠어요.
겨울잠을 자던 곰이 봄날에 깨어나 가장 먼저 찾아 헤매는 식물은 곰취입니다. 그래서 이름도 곰취라 불리우지요. 길었던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심장을 닮은 곰취를 찾아다니는 곰은 자신의 심장이 아려서일까요. 아니면 사라져 버린 것들이 아파서일까요. 난폭한 겨울의 위세에 쓰러지고, 떠나버린 것들의 흔적에서 느껴지는 건조한 통점은 아마도 검붉은 심장에서 비롯되겠지요. 겨울을 지나며 가뭇없이 사라졌지만,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서 살아가며 쿡쿡 찔러대는, 부재하지 않은 것들이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 부탁하는 것인지, 저의 일부가 되어서 그런 것인지. 결국 떠나버려도 제 안에서 살아가며 통증을 만들어 내는군요. 심장을 닮은 물방울이 맺힌 곰취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빛바랜 노트를 펼칩니다.
‘서러움이 배달 된 어느 날, 어느 이의 다정한 어깨에 기대어 울어도 보고 싶다. 복숭앗빛 석양이 드러누운 하늘이면 조금 더 좋을 것이다. 버거움이 짓누르던 어느 날, 어느 이의 맑은 눈빛을 보며 밤새워 이야기하고도 싶다. 풀벌레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오면 조금 더 좋을 것이다. 오한이 방문하던 새벽녘 어느 날, 어느 이의 따듯한 품에서 아프다 말해 보고도 싶다. 흰 눈이 은빛으로 물드는 밤이면 조금 더 좋을 것이다. 생과 작별하는 어느 날, 어느 이의 부드러운 무릎을 베고 고요를 맞이하고도 싶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흩날리는 날이면 조금 더 좋을 것이다.
그런 날이면, 조금 더 좋을 것이다.’
치유될 수 없는 태생적인 결핍을 안고서 태어난 우리들이지만, 서로의 주변을 맴돌며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 있도록 조금은 곁을 내어줄 때, 삶이 조금은 덜 쓸쓸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말씀처럼 외로우니까 사람인 것이고, 마음을 내어줄 수 있으니 또한, 사람일 것입니다.
곰취가 더 자라기 전에 곰취로 밥상을 차려보려 합니다. 그리워하는 자의 마음은 아마도 따스하고 쌉쌀한 곰취의 맛을 닮은 것만 같습니다. 타지에서 고향을 찾아오는 자식을 마을 앞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며, 들어오는 버스를 목을 빼고서 유심히 살피는 어느 부모의 마음처럼 말입니다. 달콤하진 않지만, 은은하게 느껴지는 따듯함. 겨울잠을 자고 일어난 봄날의 곰처럼, 장화로 갈아 신고서 곰취를 따러 어설픈 모양새로 설렁설렁 밭을 향해 걸어갑니다. 자연의 길을 걸을 수 있기에 외롭지만, 외롭지만은 않은 나날들이 제 안에 쌓여갑니다.
곰취로 무얼 만들어볼까 한참을 갸우뚱거렸어요. 날 것의 곰취는 초봄의 여린 잎을 먹어야 하는데, 저의 게으름 탓에 얼굴만 한 곰취 잎사귀 한 장을 머리에 이고서, 어느새 완연한 봄의 표정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본연의 식감과 향기, 그리고 맛이 너무나 궁금해서 곰취를 날것으로 먹어보려 합니다. 아마도 요리를 잘하는 친구가 이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었다면, 그러지 말라고 고개를 젓는 대신 빙긋이 옅은 미소를 보여줄 것만 같습니다. 저를 바라보던 친구의 그 미소가 제 심장 한켠에 남아 가끔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리기도 하지만, 자주 그 미소를 따라 웃기도 합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지난번 부추전을 만들고 남은 오징어가 주홍빛 불빛 아래에서 외로움으로 꽁꽁 얼어붙어 잠들어 있기에, 툭툭 건드려 깨워봅니다. 맞아요. 곰취 쑥갓 오징어무침을 만들어보려 합니다. 텃밭에서 잘라 온 곰취와 쑥갓의 줄기 끝부분을 유심히 살펴보며 조금 다듬어내고는, 맑은 물에 씻기어 잠시 우려냅니다. 싱싱한 곰취를 보니 물에 가라앉은 마음을 보는 듯합니다. 떠나가 버린 것들은 저의 곁에 부재하지만, 언제나 심연에 가라앉아 제 안에서 존재하지요. 그래서 갑작스레 봇물 터지듯 흐르는 원인 모를 눈물은 정지시키기가 어려운가 봅니다. ‘롤랑 바르트’의 말처럼, 시간은 아무것도 사라지게 하지 못하겠지요. 시간은 그저 슬픔을 받아들이는 예민함을 무뎌지게 할 뿐이기에 이별 후의 잔해들을 단정하게 담아 둘 수 밖에는 없는 듯합니다. 아무렇게나 던져진 슬픔이 곰팡이처럼 검푸른 우울로 번져가고, 방치된 슬픔이 얼음기둥처럼 동결된 무기력함으로 변해 버리지 않게 말입니다. 시간의 지층들이 쌓여가다 보면 슬픔은 떠나버린 이에 대한 그리움으로 조금씩 대체되겠지요. 그것조차 옅어져 가겠지만,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질 순 없기에 그것대로 자리 한켠을 내어주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은 없을 것만 같군요. 하지만 대체불가능하고 고유한 그리움의 향기는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힘을 낼 수 있는 긍정의 무엇으로 자리하리라는 기대감을 가져 보기도 합니다. 지금 제가 그리움을 동력 삼아 글을 쓰듯 말입니다. 심장을 닮은 가라앉은 곰취를 심연에서 건져 올리니, ‘롤랑 바르트’가 ‘사랑의 단상’에서 말한 잊을 수 없는 문장 하나가 얼음표면에 손을 댄 듯, 문득 떠오릅니다.
‘나는 그 사람이 아프네요.’
어법이 맞지 않아 더욱 아프게 다가오던 문장. ‘에피톤 프로젝트’의 노래 제목으로 차용될 만큼 아프고, 또 아픈 이 문장이 왜 물먹은 곰취를 보니 떠올랐을까요. 누군가의 존재로 인해 아픈 마음과 부재로 인해 아픈 마음은 분명, 통증의 형태는 다르겠지만, 결국 한 존재로 인해 잉태되고 지속된다는 점에서 그 사람이라서, 그 사람이 아프다는 문장은 적확한 문장인 듯합니다. 그리고 그건, 엄연하고도 엄중하게 심장이 시킨 사랑이기 때문이겠지요. 심장을 닮은 곰취를 먹으면, 제 마음이 조금은 덜 아플 수 있을까요.
곰취와 쑥갓을 큼직큼직하게 썰어 아삭한 식감을 느끼고 싶었습니다. 볼품없는 모양새이지만, 달그락 달그락 요리하는 소리가 서재를 채우니, 사람 사는 냄새인 듯해서 삶에 대한 의지를 조금이라도 더 맡으려 애써봅니다. 아마도 겨울잠을 자고 일어난 곰이 와작와작 곰취를 씹는 소리는 생을 의욕 하는 다짐인지도. 어느 음식에나 잘 어울리는 양파와 당근, 매운 고추를 듬성듬성 채를 썰며, 그들의 동그랗고 넓은 소명을 조금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심장에 가만히 손을 얹어줄 수 있는 모나지 않은 마음들이 고결해 보입니다. 언제라도 곁에 다가와 기척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들에게서 삶의 다정함을 느끼곤 합니다. 식초와 맛술, 소금, 그리고 매실청을 넣은 끓는 물에 칼집을 낸 오징어를 삼십 초 정도 담갔습니다. 비린내가 씻기고 토실토실 잘 익은 오징어를 건져 올렸어요. 꼭 다시 태어난 것만 같습니다. 제가 자연과 문장들 덕분에 다시 태어났듯 말입니다.
고추가루와 고추장, 다진 마늘과 식초, 설탕과 올리고당, 그리고 참기름과 참깨를 넣고 양념장을 만들었어요. 곰취와 쑥갓, 그리고 채소와 오징어를 빠알간 양념장으로 옷을 입힙니다. 음식은 손맛이라 하기에 투박한 손으로 조물조물 버무립니다. 심장을 닮은 곰취가 손끝에서 저릿저릿하게 만져지더군요. 마음에 마음을 더할 때, 억장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삶이라도 견뎌낼 수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는 있지만, 그리하기가 쉽지만은 않은 시절인 듯합니다. 저의 곁에는 수많은 좋은 이들이 있음을, 밀물처럼 다가오던 마음들이 있음을, 가끔, 아니 자주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만 같습니다.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나긴 인생이라는 터널에서 백색 섬광처럼 나타나 손을 내밀고, 일으켜 주는 작지만 고귀한 마음들이 가까이에 있음을 잊지 않으면 좋을텐데, 그리 쉽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현실의 반복되는 두려움과 외로움이라는 속박을 느슨하게 풀어낼 수 있는 힘은 어쩌면 특별할 게 없는 지도. 그저 서로를 항해 조금 입을 벌려 말해 주는 것뿐인지도.
당신은 나에게 특별합니다.
자둣빛 섬광이 하늘을 물들이고, 그림자가 무척이나 길어지다 이내 흐려집니다. 하얀 쌀밥 한 숟가락에 곰취 무침 한 점을 올려 먹어봅니다. 누군가가 찾아와 맛보았다면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저를 빤히 바라봐 주었을 것만 같은 맛입니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혼자서 밥을 먹고 있을 모든 이들에게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듯한 쌀밥 한술과 곰취의 마음을 바칩니다. 건너편에 혼자 사시는 할아버지께 가져다드리기 위해 그릇을 꺼냅니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다는 어느 가사말처럼 오늘도 세상에 산재한 사무친 외로움들은 용해되고, 응고되기를 반복하는군요. 당신은 아마도 잘 모르겠지만,